영화 '아이스 스톰 (1997)'은 전혀 회복할 수 없어 보이는 가족의 화해를 다룬 이야기이다. 영화의 도입부와 결말은 폴(Tobey Maguire)이 뉴욕에서 근교의 집으로 돌아오는 열차 장면으로 겹친다. 한차례 아이스 스톰이 미국 북동부를 강타한다. 마침내 정전으로 전 도시의 활동이 멈춘다.
정적을 뚫고 얼음을 지치며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폴이 마주한 가족은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을 연상시킨다. 아버지는 마침내 눈물을 터뜨리고 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회복 불가능한 관계들이 영화에 산재해 있다. 벤(Kevin Kline)과 엘레나(Joan Allen)의 부부 관계도 이미 파탄이 난 상태이고, 벤은 자식들과도 전혀 소통할 수 없다. 벤과 바람을 피우는 이웃집 부인인 제이니(Sigouney Weaver)도 육체적 교감만 가능하다. 마이키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분자에 관한 얘기만 한다. 폴이 사랑한다고 생각한 리베츠도 짝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영화 속의 사람들은 홀로 떨어져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인물만이 있을 뿐이다. 다른 영화처럼 화려한 로맨스를 꿈꾼다는 것은 사치처럼 여겨지고, 오히려 그런 관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파탄이 난 관계를 유발한 이유는 영화 내부에 있기보다는 미국 사회에 있다. 1970년대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에 대한 회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가치관이 혼란한 상태이다. 아버지라는 권위가 지켜온 가치들이 하나씩 부서지고,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그야말로 무질서 자체이다.
때마침 내리는 아이스 스톰은 겉으로 화려해 보이지만, 실제로 깊은 상처를 주는 마비된 사회상을 드러낸다. 아이스 스톰이 거둬들인 생명은 마이키 하나뿐이 아니다.
위선적인 권위가 낱낱이 까발려져서 풍자되는 것을 잘 드러내는 인물은 벤이다.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성교육을 시킨다고 뭔가 얘기하지만, 솔직하지 못한 모습은 아들에게 정서불안으로 보여진다. 웬디(Christina Ricci)와 마이크가 패팅을 하는 것을 목격한 벤도 역시 바람을 피우는 중이었다.
어설프게 웬디에게 충고하려고 하지만 벤은 이미 관객에게 역설적 웃음을 유발한다. 벤에게서 어디에서라도 존경받을 만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고, 오히려 아이들보다 더 조롱의 대상이 된다. 벤의 모습은 닉슨과 너무나 닮았다. 닉슨의 거짓말은 텔레비전을 통해 아이들에게도 비난의 대상이 된다. 권위적인 아버지들의 위신은 땅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어른들도 아이들의 사춘기처럼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다. 개인, 가족, 국가도 방향을 상실한 채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영화 속에는 수많은 섹스가 등장하지만, 어느 것도 에로틱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거나,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무의미한 섹스를 통해서 기대하는 바도 거의 없다. 단지 현재의 우울, 불안을 달래기 위한 자학에 가깝다.
벤과 제이니의 관계조차 육체적인 위로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키파티(Key Party)를 통해 섹스 상대를 바꾸는 엘레나와 제이니도 허무하고 구질구질하다. 사랑의 확인과 새로운 생명력을 상징하는 섹스는 자취를 감추고, 일상의 탈출, 가치관 상실 그 자체를 드러내 준다.
무질서, 무도덕, 혼란 자체를 드러내는 아이스 스톰은 기후를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일상적인 사물을 통해서 나타나기도 한다. 냉장고에서 얼어붙은 고깃덩어리들, 얼음통에 담긴 얼음은 일상적 차원이다. 특히, 자주 등장하는 얼음통에서 얼음을 꺼내는 것은 얼어붙은 관계를 상징한다. 가족구성원들 사이의 단절, 가족들 간의 고립이 얼음통에 갇힌 것을 의미한다.
키파티까지 열면서 무의미한 만남을 가지지만, 서로를 더욱 이해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가족들이 다 같이 모인 추수감사절의 식사도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다. 얼음케이스 밖으로 나오는 얼음이 귀에 거슬리는 소음을 유발하듯,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도 얼어붙은 선로를 벗어나느라 거친 소리를 낸다. 이런 소음은 영화 곳곳에 편재해서 전체적으로 불안한 관계를 역설적으로 표상한다. 완전한 침묵보다 미묘한 소음이 더 소름 끼친다. 소음이 야기하는 소름은 얼어붙은 관계의 역설적 상징이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영화 '아메리칸 뷰티'도 미국의 중상층 가족의 허물어지는 광경을 잘 보여준다. '아이스 스톰'에서 가족은 이미 유대감을 상실한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속으로는 이미 망가져서 허물어지고 있지만, 겉으로는 강인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이중적인 모습이 아이스 스톰이다. 무너져버린 관계를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고, 강한 척하며, 얼려버린 아이스 스톰은 미국의 가족상의 또 다른 표현이다.
녹으면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릴 얼음을 지키려는 노력이 가족을 근근이 버티게 해 준다. 플랫폼에서 아들을 맞이하는 가족의 초상은 이들의 노력을 반영한다.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며, 행복하기까지 한 가족의 이면에 담겨있는 우울함이 플랫폼에 흐른다. 이 영화는 어떤 대안도 보여주지 않고, 현재의 우울한 초상을 충실히 표현하면서 끝을 맺는다.
이 영화는 불안한 중산층의 가족상, 혼란스러운 정치사의 질곡 속에서 개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되새겨보게 만드는 면이 있다. 개인이 얼마나 가족제도 속에서 고통받는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가족제도에 대한 회의도 엿볼 수 있다.
미국 중산층 가족의 행복이 도대체 무엇인가? 가족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하나? 그들이 유지해야 하는 가족이 얼마나 가치가 있나? 어쩌면 사랑을 비롯한 모든 것을 초월해 있는 가족이 유지되고 있는지 모른다. 또한, 가족으로 상징되는 모든 공동체가 기초한 관계도 비판받는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 자체보다 이상이 중시된 미국의 가치관 혼란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벤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 울음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가족인가, 자신인가, 아니면 사랑했던 제이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