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에 관한 이론의 장을 펼친 장 보드리야르의 죽음은 가상현실이 아니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대중적으로 알린 스타 사상가이기도 했던 보드리야르는 2007년 3월 6일 프랑스 파리에서 타계했다. 그의 사상은 대중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매트릭스' 3부작이 그의 사상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워쇼스키 형제가 영화에 보드리야르를 출연시키려고 했었지만, 보드리야르가 거부했다. 그는 나중에 영화 매트릭스가 자신이 말한 가상현실을 왜곡했다고 비판했다.
90년대 초반 한국에서 포스트 모더니즘 열풍이 불었을 때, 그의 인기도 하늘로 치솟았다. 보드리야르는 그의 대표작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에서 '모사된 실재'가 '실재'를 대체하는 현대 사회를 설명하였다. 현실보다 더욱 실제처럼 다가오는 모사된 현실은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개그맨 이윤석이 한때 시뮬라시옹으로 개그를 구사했지만, 아쉽게도 인기를 끌지 못했다. 개그로 전달하기 너무 어려운 개념이 아니었을까? 대학시절 시뮬라시옹에 관한 책을 읽어본 적 있지만 쉽게 읽히지 않았다.
나중에 '소비의 사회'를 읽어보았는데, 현대 소비사회를 비판적으로 다룬 글이었다. 내용도 시뮬라시옹에 비해서 쉬웠고 재밌었다. 현대인은 상품의 기능이나 사용가치를 따지기보다 이미지나 외양적 가치에 더 매몰된다. 이 책이 출간된 1970년 무렵 그의 사상은 마르크시즘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그의 사상을 처음으로 접한 나는 마르크시즘적 요소가 의외였다.
보드리야르의 지도교수는 앙리 르페브르였고, 학문적 멘토는 롤랑 바르트다. 후기의 저작들이 왜 기호학적 요소를 다룬 이유를 조금은 알겠다. 그의 책 '아메리카'를 보면서 조금 놀라웠다. 그가 미국을 돌아다니면서 찍은 사진들이 수준급이었다. 그 책을 통해 사상가이면서 사진가이기도 했던 그의 이력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50여 권에서 인종, 성, 문학, 예술, 광고, 9/11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
그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일화는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주장은 도발적인 발언일 것이다. 현실의 전쟁은 참혹하지만, 텔레비전 뉴스화면으로 보는 사람들은 마치 게임의 화면처럼 여기게 된다. 전쟁이라기보다는 미디어에서 다루는 사건에 불과하다.
그가 남긴 가장 인상적인 문구는 아래의 2005년 뉴욕 타임스 인터뷰다.
세상의 가치는 모두 모사된 것에 불과하다. 자유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차를 살 것이냐, 다른 차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그 정도의 자유밖에 없다. 이것은 모사된 자유일 뿐이다.
그는 말년에 상품의 교환을 기초한 자본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남겼다. 9/11의 세계화의 무분별한 확장이 초래한 결과라고 했다. 이 발언에 화가 난 미국의 사상가들이 반발하기도 했지만, 그의 논리가 시사하는 부분은 분명히 있었다.
나는 보드리야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주장한 포스트 모더니즘에 반감을 품었다. 보드리야르는 현란한 수사학으로 이미지가 현실을 압도하는 현상을 잘 서술하고 있지만, 권력의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에 동의할 수 없다.
미국 미디어가 점점 보수적으로 변해가는 이면에는 미디어 기업의 독과점화가 존재한다. 보드리야르는 광고와 이미지 과잉이 된 현실을 문학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문제의 근원까지 파고들지 않는다. 보드리야르는 실재를 찾는 건 불가능하니 포기하라고 말한다. 그의 비관적인 시각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 저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심한 반감을 버리고, 그 효용을 고민하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사상이 다른 사상들과 경쟁하는 세상은 지속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비롯해 그가 남긴 철학적 유산은 결코 가볍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