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지식인들은 외래어를 문화 자본으로 철저하게 활용한다. 그중에 가장 만연하게 사용되는 용어는 단연 영어이고, 지식인들은 영어를 일상어 수준으로 쓰면서 자신을 차별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한다. 지식인들은 자신이 습득한 외래어를 지식 자본으로 쓴다. 마치 신종 유행어를 대중들에게 전파하는 경쟁에 나선 지식의 전도사들처럼.
외래어의 수용을 전면 거부할 필요는 없지만, 거기에 해당하는 한국어가 있음에도 굳이 외래어를 쓰는 건 이해할 수 없다. 최근에 눈에 띄게 늘어난 외래어가 '팩트'이다. 이는 '사실', '근거' 같은 한국말로 충분히 바꿔 쓸 수 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더니 정말 가관이다.
그러나 17일 조선, 중앙, 동아 3개 신문에 모두 실린 ‘종부세 급매물이 쏟아진다’라는 기사는 그동안 보수언론의 논조를 스스로 뒤집는 ‘팩트’이다. -- 국정브리핑
이들은 주로 한국 내의 뜨거운 반응과 양국 비준을 둘러싼 일정, 미국 정계의 반응 등을 팩트 위주로 보도했다. -- 매일신문
강 아무개 교수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팩트에 근거해 간접수용 여부를 결정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뭘 뜻하는지 국민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하다”라고 지적했다. -- 한겨레신문
외래어와 한국어가 꼭 일대일 대응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팩트와 사실의 의미가 엄청나게 다른 건 아니다. 똑같은 말이라도 영어로 말하면 폼이 나는지? 김규항은 이런 상황을 두고 식민지라고 말한다. 식민지 상황이라고까지 말하진 못하겠지만, 충분히 경계할만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외래어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나 전문성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이런 외래어를 쓰는 지식인들의 그 정신 세계가 무척 궁금하다.
이들의 잘못된 사용을 바로잡지 못 하고 그대로 인용하는 언론도 문제가 있다. 외신 보도를 베끼어 쓰는 관행을 벗어나지 못하고, 한국 상황에 맞게 번역도 제대로 못 하는 언론 역시 외래어의 일상화에 동조한다. 언론과 지식인 사회의 영어 남용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외래어를 많이 쓸수록 전문 지식인 대접을 받는 사회풍경도 볼썽사납다.
충분히 바꿔서 쓸 수 있는 한국어가 있다면 그 용어를 쓰는 게 마땅하다. 부지런하게 한국어로 바꾸는 노력을 한다면 지금처럼 영어 위주로 된 풍토를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