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통에 먹던 스파게티

아내의 추천으로 만들어 본 볼로네즈 스파게티는 아들과 씨름하느라 지친 마음을 녹여주기에 충분한 음식이었다. 일단 요리 과정이 간단하고 쉬워서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그냥 재료를 다져서 푹푹 삶다가 스파게티를 익혀서 섞어주면 그만이다. 만드는 시간이 길다는 단점도 있지만, 냄비 옆에 항상 붙어 있지 않아도 되니 중간에 책이나 읽으면서 가끔 저어주기만 하면 된다.

한 번 실패를 맛보고 나서 요리를 시작하니, 처음부터 긴장감이 팽팽하게 느껴져 칼질도 쉽지 않았다. 잘게 다져야 하는데 어떻게 잘라야 할지 막막해서 대충 느낌대로 잘랐다. 당근을 정성을 들여 동그랗게 자르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그렇게 잘라서 언제 잘게 자르느냐는 핀잔을 들었다. 먼저 세로로 자른 다음에 그걸 모아서 다지는 신공을 처음으로 배웠다. 이렇게 칼질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게 요리 초보인 나에게는 마냥 신기했다. 음식마다 자르는 모양에 통일감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세상에 이렇게 배워야 할 게 지천으로 널렸고 나는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당근, 샐러리, 양파, 마늘을 차례로 다지고 나니 땀이 약간 흐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이 정도 수고쯤이야. 다행히 고기는 이미 다져진 것을 샀고, 토마토는 통조림으로 준비해서 약간의 수고를 덜 수 있었다. 모든 걸 내가 준비할 필요는 없다. 나는 전통의 방식을 고수하는 요리사도 아니고, 현대 문명의 이기를 활용할 수 있는데 굳이 거부할 의사도 없었다. 나는 맛과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모든 걸 허용하는 관대한 현실주의자니까. 재료를 다 다듬어서 준비했으니 이제 팬에 기름을 두르고 채소를 살짝 볶다가 고기와 토마토를 넣어서 뒤적거렸다. 물을 붓고 잘라둔 바질까지 넣고 끊이기 시작했다. 눌어붙지 않게 중간중간에 저어주면서 한 시간 정도만 기다리면 된다. 마지막에 파메르산 치즈까지 넣고 섞으면 끝.

볼로네즈 소스를 끊이는 동안 이 음식의 역사를 살펴봤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유력한 건 2차 세계 대전 군인들이 퍼뜨렸다는 설이다. 군인들이 볼로네즈 지방 근처에서 먹어본 파스타 맛을 잊을 수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와서 동네 이탈리아 식당에 가서 얘기했더니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다 보니 전통적인 볼로네즈 요리 방법과 똑같이 할 수는 없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맛본 음식과 편안한 식당에서 앉아 주문해서 먹는 맛이 같을 리는 없겠지만 살아 돌아온 행운이 더해져 이 소스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세상을 파괴하는 전쟁이 음식문화를 전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가까이 찾아보면 한국 전쟁 중에도 미군 주둔지 근처에서 스팸, 소시지 같은 미국 음식 재료와 김치가 만나서 부대찌개라는 음식이 생겨나기도 했다. 전쟁 중에 미국 재즈가 유럽에 유행한 것처럼 음식도 삽시간에 다른 나라로 퍼진 건 예사였다. 무엇보다 먹고 즐기는 것의 세계화가 가장 빠른 법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전쟁의 기억이 비록 아련해지더라도 음식은 고스란히 남아 사람들을 기쁘게 해준다.

볼로네즈 소스는 생각했던 것보다 직접 만들어보면 어렵지 않으면서 근사해 보이면서도 간편한 이탈리아 요리였다. 앞으로도 자주 해 먹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음식이다. 채소와 고기를 넉넉히 넣어서 끊인 음식이라 과연 군인들의 허기도 달래기에 충분해 보인다. 엠티나 야영장에서 매번 카레나 참치 찌개만 먹어서 지겨웠는데 볼로네즈 소스를 만들어 먹으면 별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음식은 미국에서 흔히 고기 소스 스파게티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만큼 대중적인 이탈리아 음식 중에 하나다. 한 그릇 먹으면 몸도 마음도 든든하다. 스파게티만 삶아서 볼로네즈 소스를 얹고 고명으로 여분의 파메르산 치즈와 바질을 뿌려주면 완성된다. 한 번 만들 때 조금 넉넉하게 만들어 냉동실에 얼려두었더니 부자가 된 것 같다. 바쁠 때 언제든지 해동 시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배우니까 후원군을 얻은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하다. 이렇게 후원군 요리가 하나씩 냉동실에 차곡차곡 쌓여갈 때마다 보급품을 공수받은 것처럼 안 먹어도 배가 푸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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