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보다 경험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순전히 대본을 각색한 소설가 닉 혼비 때문이다. 그의 소설을 좋아하니 그가 대본을 쓴 영화는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소설가가 쓴 탓인지 소설 느낌이 아주 강한 영화가 되었다. 재치 있는 대사와 심리묘사는 두드러졌다. 영상이나 연출이 줄어든 대신에 대사와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났다.

“언 애듀케이션”은 60년대 초반 영국의 한 소녀가 중년의 남자와 연애하는 이야기다. 물론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닉 혼비가 영화로 각색하였다. 이 영화는 영국이 전쟁의 그늘을 서서히 벗어나고,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면서 변화하기 시작한 풍경을 잘 드러낸다. 사립학교의 엄격한 규율이나 보수적 기성세대가 강요하는 가치에서 숨죽여야 했던 제니는 욕망이란 폭탄을 언제든지 터트릴 준비가 되어있다. 60년대는 억눌린 욕망이 한꺼번에 터지던 순간이었다.

캐리 멀리간이 맡은 제니는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을 매우 닮았다. 이들은 기성세대의 권위에 강하게 반발한 반항아이다. 정확한 시기로 따지면 홀든이 십 년 정도 앞서지만 제니의 경험이나 정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쟁으로 삶이 황폐해지고 자유가 억압된 보수적 시대를 살아야 하는 답답함에 질린 세대가 바로 홀든과 제니였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제니가 바라는 삶은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엘리트가 되어서 물질적 부를 마음껏 누리는 거였다. 그런데 옥스퍼드에 갈 필요도 없이 그 꿈을 당장 실현해줄 남자가 제니 앞에 나타난다. 16세 소녀와 중년남성의 연애라니 이건 원조교제가 아닌가. 최고급 식당에서 밥을 먹고, 클래식이나 재즈공연을 보며, 마음이 내키면 해외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제니가 간절히 원하던 화려한 삶이었다. 이 모든 것을 다 갖춘 데이빗을 만난 제니는 로또에 당첨된 사람처럼 행복하다.

세상사를 잘 모르는 순진한 제니가 방탕한 삶에 빠진 건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걸 말리지 않는 부모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하지만, 제니가 데이빗을 만나서 겪은 경험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사뭇 달랐다. 셰익스피어의 문학작품이나 라틴어 교과서에서 등장하는 추상적인 캐릭터나 단어는 몸으로 체험하는 것과 같을 수 없었다.

아무리 A 학점을 받는 똑똑한 제니라도 데이빗이 누리는 화려한 삶에 깔린 갈등이나 무게는 읽을 수 없었다. 담배와 술로 도덕을 마비시키며 하루를 보내는 삶이 행복한 인생이라고 믿고 싶었을까. 전후의 남루하고 피곤한 일상을 벗어나 안락한 삶을 원하던 세대의 구성원이었던 제니나 부모가 한 선택은 극단적이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현실을 피하기만 한다면 밝은 미래가 다가올 거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전쟁의 공포,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불안감, 가난의 지긋지긋함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50년대와 60년대를 설명하는 시대정신일지도 모른다. 빠른 성공을 향해가는 가장 합법적인 지름길이 교육이었고, 옥스퍼드는 가장 확실한 투자였다. 제니는 이 시대의 평범한 인물이었고, 잠시 일탈을 꿈꾸며 더 빠르게 달려가려 했었던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동안 수많은 성장 영화가 남성의 시각을 다루었다면, 이 영화는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이 중심이 된다. 그렇지만 단순히 순진한 여성이 더러운 세상에 의해 파괴되는 “테스”의 시각과도 다르다. 복수까지는 아니더라도 당당하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여성이 제니였다. 이런 시각은 60년대라는 시대와 일치한다. 제니를 통해서 시대정신을 보여주려 한 것을 짐작하게 한다.

닉 혼비의 시나리오는 훌륭했지만, 그의 독창적인 글이 아니라서 그런지 영화에서 위트와 재치는 그다지 느낄 수가 없었다. 영화와 소설의 미학적 차이 때문이겠지만 닉 혼비는 소설을 쓸 때 자신의 재능을 더 강하게 드러낸다. 글이 영상이나 음악으로 바뀌는 순간에 그의 재치는 살짝 얼었다. 글로 표현된 세상에서 제니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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