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가 바꾼 인생

닉 혼비의 독서일기의 두 번째 이야기에 해당하는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서가에서 책을 찾다 뜻밖의 만나는 책이 있다. 이 책을 마주한 것도 그런 운명에서 싹이 텄다. 닉 혼비의 책보다도 짧아서 금방 읽게 되었는데 미국 여성의 독서 경험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책의 저자 애나 퀸들랜은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로 활약하다가 소설가가 된 사람이다. 그의 소설을 읽어볼 기회는 없었지만, 이 책을 읽다 보니 어떤 소설을 썼을지 궁금했다. 비록 소설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 책으로 그의 수필은 마음껏 느낄 수 있었다.

독서와 연관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어머니의 친구였던 이웃집 아줌마의 지하실 서재가 나온다. 벽을 가득 채우고 있던 책에 매료되어서 그 집을 드나들던 경험이 저자의 글쓰기에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이 내용을 읽으면서 내게도 그런 이웃이 있었으면 하는 부러움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구색 갖추기로 마련된 학교 학급문고가 전부였고 그 시절에는 제대로 된 도서관도 드물었다. 내가 제대로 된 독서를 체험하게 되었던 건 대학에 들어가서야 가능했던 거 같다.

애나는 책을 여행이라고 비유했다. 책만 있으면 집 안에서도 러시아 시베리아 벌판으로 떠날 수 있었고, 시간을 초월해서 그리스 신화의 세계를 떠다닐 수도 있다. 공간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여행을 가능하게 한 책. 책으로 경험하는 세계에 제약은 없었다고 술회했다.

이 책에 아쉬운 것은 지나치게 책 제목을 나열하는 데 치중하느라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전개하지 못한 점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이런 책에서 기대한 것은 책과 관련된 일화나 성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런 깊이는 느낄 수 없었다. 저자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다는 사실에 압도당할 뿐이다. 한국에서도 유명 저서를 나열하는 소설이 한때 유행한 적이 있다. 주로 1990년대 초중반에 나온 80년대 운동권 후일담 소설이었는데 작가는 책에서 수많은 사상가의 서적을 끊임없이 나열하는데 몇 장을 할애하곤 했다. 나는 언급된 서적의 많은 양에 짓눌려 제대로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내용은 없고 허세로 가득한 글이 대부분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름으로 상대를 누르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처럼 느껴졌다.

애나는 독자의 기를 죽이려고 이 책을 쓴 것은 아니겠지만 구색을 갖추려 동원된 책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적어도 인생에 영향을 끼친 책이라면 그에 어울리는 적당한 일화나 생각이 있어야 한다. 호명 당한 고전 가운데 멋쩍게 자리만 채우고 있는 책들이 상당했다. 만약 이 글이 신문의 칼럼이라면 짧은 지면의 한계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책이라면 그 기대 수준이 높아진다. 차라리 나열된 작품의 수는 줄이더라도 심도 있는 이야기가 전개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에서 기억에 남는 내용은 금서에 관련된 기억과 기술의 발전에 따른 책의 위기를 논하는 부분이다. 이 책이 출간된 해가 1998년이니까 지금처럼 전자책 논의가 활발하던 시절은 아니었다. 물리적 책이 사라진 암울한 미래를 걱정하는 듯한 어조로 글을 시작하지만 종이책에 대한 믿음은 강했다. 책이 등장하면서 구술전통이 약해지고 시도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플라톤의 일화를 언급하면서, 애나는 비록 디지털 책의 시대가 오더라도 소설이나 문학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우리는 어쩌면 책에 필기도 하고 냄새도 맡던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자책 출판이 본격화되면서 종이책에 대한 향수를 담은 글은 낡은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애나가 책을 통해서 경험한 세상은 디지털 세대에도 이어질 것을 믿는다. 물론 기존 세대가 경험한 책은 아닐지라도 책의 역사는 기술의 변화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은 저자가 만든 추천 도서의 목록이다. 기나긴 여름에 읽기 좋은 책 10권, 10대가 인간적으로 느끼게 한 책 10권, 작가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된 책 10권 등속이다. 이 추천 도서 목록만 건진 것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독서였다. 이걸로 내가 읽을 도서목록이 더욱 풍족해졌다. 그 목록 가운데 하나를 소개한다.

불이 났을 때 반드시 가져가야 할 책 10권

  • Pride and Prejudice by Jane Austen
  • Bleak House by Charles Dickens
  • Anna Karenina by Leo Tolstoy
  • The Sound and the Fury by William Faulkner
  • The Golden Notebook by Doris Lessing
  • Middlemarch by George Eliot
  • Sons and Lovers by D. H. Lawrence
  • The Collected Poems of W. B. Yeats
  • The Collected Plays of William Shakespeare
  • The House of Mirth by Edith Wha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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