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시장으로 부활하는 미국 파머스마켓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파이어니어 공원에 들어서자 입구부터 왁자지껄한 사람 소리에 압도된다. 바비큐, 핫도그, 통닭 냄새가 진동한다. 멕시코 음식 가판대에는 50여 명의 사람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중앙 잔디밭에서 흥겨운 음악이 들려와 음식 냄새와 사람 사이로 스며들어 한 편의 드라마를 이룬다.

곳곳에서 옥수수, 사과, 고추, 양배추, 치즈, 쇠고기 등 농작물 판매가 한창이다. 수북하게 쌓인 멜론에 유성 펜으로 휘갈겨 쓴 가격표가 이색적이다. 밀짚모자를 쓴 아저씨가 저울에 멜론을 달아보고 싸게 주는 거라면서 손님에서 팔고 있다. 가판과 수많은 사람으로 좁아진 공원은 한껏 멋을 내고 나온 애완견들로 더 정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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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트레이크시티 파이어니어 공원은 1990년대 초반에는 마약 거래상의 아지트였다고 한다. 지금은 농산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풍선으로 자전거를 만들어 아이에게 건네는 피에로도 보였다. 배가 고프면 빵도 사 먹을 수 있고 심심하면 잔디밭에 앉아 음악도 들을 수 있다. 저녁거리나 동네 특산품 꿀이나 치즈를 사서 돌아가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마치 시골 장터와 지역 축제를 합쳐놓은 듯한 모습,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머스마켓’의 풍경이다.

매주 두 번의 ‘잔치’가 열리는 파이어니어 공원

내가 사는 동네인 솔트레이크시티 파머스마켓은 매년 6월에서 10월까지 화요일 오후와 토요일 오전에 열린다. 올해로 벌써 17년째다. 매년 방문객이 늘어 올해는 200개가 넘는 부스가 설치됐다.

파머스마켓은 도시 근처의 농민들이 자신이 직접 기른 과일, 채소, 고기 등 각종 농산물을 주기적으로 파는 공공시장을 말한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중간상인 없이 직접 만나는 직거래 장터다. 우리나라의 5일장과 비슷하다. 도시 사람들에게는 축제이자 아이들 생태 학습장이다.

이름은 ‘농민시장’이지만, 농민만을 위한 시장이 아니다. 인근의 식당, 빵 가게, 커피하우스도 부스를 마련하고 음식과 음료를 말고 가게 홍보도 한다. 지역의 록그룹도 이곳에서 공연을 준비한다. 행사를 위한 주차장은 근처 식당에서 제공한다. 동네 은행은 이용자들이 편하게 쇼핑할 수 있도록 임시 현금지급기를 설치한다. 이곳은 공예품 시장도 함께 겸하고 있어서 손으로 직접 짠 옷이나 카펫을 사거나 다양한 공예품도 구경할 수 있다.

솔트레이크시티 근처 오렘(Orem)에서 5대째 농사를 짓는다는 베리 쿡은 더는 대형슈퍼에 농작물을 팔아서 먹고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아 파머스마켓에 나오게 됐다고 말한다. 중소규모 농장이 중간 상인에게 농작물을 헐값에 넘기면 농장운영 자체가 어려워진다고. 농작물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놓인 장막을 걷어내면 비용도 상당히 줄고 인간미 넘치는 만남까지 이뤄진다며 좋아한다.

사실, 파머스마켓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농촌 사람이 재배한 농산물을 직접 가져다가 도시에 파는 일은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도시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 나는 신선한 농산물을 시장에서 바로 사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으니 좋았고, 농촌 사람들은 농산물이 숙성할 무렵 바로 내다 팔 수 있어서 좋았다.

농민 감소와 함께 쇠락한 농업

그런데 농민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1920년 전체 인구의 30.2%를 차지했던 농장 주민 수는 1990년대에 2%도 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농장 인구수가 급격하게 줄자, 미국 통계청은 1993년부터는 통계도 내지 않았다.

이와 함께 현대식 슈퍼마켓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파머스마켓도 위기를 맞았다. 1960년대에는 100개도 채 되지 않는 파머스마켓만 남았을 정도다. 도시와 농촌이 직접 만나는 공공시장으로서의 파머스마켓은 슈퍼마켓이라는 중간 상인에 가려져 빛을 잃어갔다. 그리고 지역 슈퍼마켓은 다시 대형 슈퍼마켓 체인에 밀려 사라지고 있다.

요즘은 스미스나 알버슨 같은 대형 슈퍼마켓이 대세를 이룬다. 비즈니스리서치 전문회사 후버스에 따르면, 7만 개가량의 미국 슈퍼마켓 연 매출이 5천억 달러에 달한다. 그리고 그중 크로거, 세이프웨이, 슈퍼벨류 등 상위 50개 거대 체인 슈퍼마켓이 전체 매출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널찍한 주차장과 깨끗한 시설까지 갖추고 전 세계에서 수입한 다양한 농산물까지 파는 대형슈퍼체인의 편리함을 소비자들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 요즘 같은 경제위기 속에서 경제적 소비는 합리적 선택이다. 지역 공동체 속에서 숨 쉬던 동네슈퍼가 경쟁에 밀려 사라지는 것을 지켜줄 여력이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파머스마켓에 다시 가능성의 날개를 달아준 것은 ‘유기농’ 농산물의 등장이었다.

부활의 조짐 “미셸 오바마도 다녀갔답니다”

살모넬라균에 오염된 토마토, 땅콩버터와 이콜라이균에 노출된 시금치 등 음식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하면서 주로 고학력층과 부유층을 중심으로 살충제나 화학비료를 덜 쓰고 지역에서 키운 유기농을 선호하는 문화가 퍼졌다. 유기농 농산물은 198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하더니 1990년대부터는 매년 20%씩 성장하고 있다.

1980년과 1987년에는 유기농 전문 슈퍼마켓인 홀푸드마켓과 와일츠오츠가 각각 등장했다. 일반 대형슈퍼마켓도 유기농, 친자연 농산물 비중을 늘리고 있다. 2002년에는 유기농 표시농산물 인증제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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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텔 인터내셔널 조사에 따르면 유기농 제품의 판매량은 2005년 21%, 2006년 22%, 2007년 16%, 2008년 14%가 늘었다. 경제위기로 성장률이 둔화한 것을 고려하면 주목할 만한 성장이다.

이런 흐름을 타고 파머스마켓을 찾는 소비자가 다시 늘기 시작했다. 1976년 미국 연방의회가 발표한 ‘농민-소비자 직접 판매법’을 통해 대안시장으로서의 길을 모색하고 있던 중소규모 농민들은 이런 달라진 분위기를 타고 파머스마켓 재활에 힘을 쏟았다. 미 농무부는 올해 450만 불의 파머스마켓 홍보예산도 책정했고, 또한 6월부터 10월까지 매주 금요일마다 주차장에 자리를 마련해 직접 파머스마켓을 열고 있다.

이제 파머스마켓은 사라졌던 전통을 복원하면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미국 농무부 통계에 따르면 1994년에 1755개 정도를 유지하던 파머스마켓은 2009년 현재 5274개로 급격히 증가했다. 워싱턴주 시애틀의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은 1990년대에 이미 연간 9백만 명의 방문객을 유치하고 9백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는 성공적 파머스마켓이 되었다. 과거의 파머스마켓과 달라진 점이라면, 대안시장으로서의 이미지가 강조된다는 점이다.

2009년 9월 19일에는 미국의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도 백악관 근처에 새로 생긴 파머스마켓을 찾았다.

파머스마켓이 진정한 대안 될 수 있을까

파머스마켓은 농민, 소비자, 지방정부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농민은 자신이 생산한 농작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얻을 수 있으며 기업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다. 이들은 파머스마켓을 통해 자립적 농장 운영의 길을 찾아가는 중이다. 소비자는 신선하고 건강한 농작물과 지역 특산물을 쉽게 구입할 수 있다. 지방정부는 도시 중산층이 교외로 빠져나가면서 생긴 도심 슬럼지구화문제를 파머스마켓 유치로 극복 중이다. 특히 직거래 마케팅으로 지역농업을 안정시키고 관광객 유치와 중·소규모 사업을 강화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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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파머스마켓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대형슈퍼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다. 파머스마켓은 대체 시장이라기 보다는 대안 시장이라는 의견이 다수인데, 경제학자 브루스터 닌이 대표적이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모잠비크, 마다가스카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생산한 사탕수수를 수입해서 쓰게 되었지만 그 수익의 대부분은 농민이 아닌 기업들 몫이었죠. 기업들은 음식을 돈을 버는 수단으로만 바라봤습니다. 현대의 음식 기업들은 음식을 먹는 소비자와 생산하는 농민의 거리를 최대한 벌려놓고 그 사이에서 최대한 이익을 취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습니다. 저는 농업이 가족을 먹이고 지역공동체를 먹이고 난 다음에 남는 거로 상업적 이익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시장경제에는 지역공동체 해체나 기아 문제를 해결할 출구가 없습니다. 파머스마켓은 시장경제의 대안적 모델로 농작물 소비자와 생산자가 서로를 도울 수 있고 시장에서 소외되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저소득층에게는 비용부담이 적지 않다는 한계가 있다. 2008년 민텔 인터내셔널 조사에 따르면, 파머스마켓을 찾는 사람들의 56%가 10만 불 이상의 고소득층인 것으로 나타났다. 2만5천 불 이하의 저소득층은 36%밖에 되지 않는다. 미 정부도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3500만 명 이상 저소득층에게 푸드 스탬프를 제공해 파머스마켓에서 쓸 수 있게 해주었지만, 이것이 진정한 대안이 될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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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머스마켓의 떠들썩한 울림은 지역경제가 살아나는 소리처럼 들린다. 파머스마켓은 경제적 활동이면서 지역사회를 살리고 함께 사는 문화적 활동이기도 하다.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팔고 사면서 정겹게 한담을 나누는 풍경은 대형슈퍼에서 결코 찾을 수 없다. 지역경제의 위기를 주변 농업인구와 함께 고민하고 공생하려는 이러한 노력이 메말라가고 있는 공동체를 제대로 살려낼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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