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여행을 하는데 테마가 있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자연경관이 멋진 장소를 찾아다닌다. 어떤 사람은 축제나 공연만 쫓아다닌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지방의 유명한 음식을 먹으러 다니기도 한다. 나는 주로 미술관이나 공연을 중심으로 여행을 계획한다. 특히, 거리음악가의 공연을 즐기는 편인데 이번 시카고 여행에서 그럴 기회가 별로 없었다. 워낙 빠듯한 일정이라서 여유 있게 거리음악을 즐길 수 없어서 못내 아쉬웠다. 그래도 비교적 여유가 있었던 밤을 틈타서 블루스 바와 재즈 바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블루스 바는 생전 처음이었다. 블루스란 음악도 듣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 없이 갔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좋았고 훨씬 색다른 문화적 충격이었다. 애초에 방문하려던 블루스 바는 인터넷으로 미리 검색해둔 “버디 가이스 레전드”란 곳이었는데 묵는 호텔이랑 너무 멀어서 포기하고 대신에 호텔 근처에 있는 “블루 시카고”로 가기로 계획을 바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날 공연한 팀이 다른 날에는 “버디 가이스 레전드”에도 나온다고 한다. 뮤지션은 시카고 블루스 바를 돌고 도는 거라서 큰 수준 차이는 없는 것 같았다.
아내랑 시카고에 살고 있는 아내의 친구랑 셋이서 “블루 시카고”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블루스 바 가득히 울려 퍼지는 블루스 기타 소리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입장료로 10달러를 내고 무대 근처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각자 맥주 한 병을 시키고 바로 음악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연주 소리가 너무 커서 도저히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날 공연은 린제이 알렉산더 밴드였다. 입담도 좋고 아주 걸쭉한 농담을 늘어놓는 흑인 할아버지였다. 기타 연주도 말할 것도 없이 끝내줬다. 특히 자신의 음악을 똥이라고 하는 표현도 재밌었다. 유명 밴드의 커버와 자신의 음악을 섞어가며 흥미진진한 공연이 무르익어갔다.
블루스라면 게리 무어 정도밖에 몰랐던 내게 정통 시카고 블루스는 전혀 새로운 세계였고 더욱 바닥으로 내려간 듯했다. “블루 시카고”에서 주로 공연하는 팀도 그런 정통 시카고 블루스라고 한다. 린제이 알렉산더가 하는 흑인 속어와 억양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아주 노골적인 성 표현과 흑인 차별에 관한 노래도 몇 곡을 불렀다. 현대적 세련된 음색이 아닌 맥주 몇 잔이 걸친 듯한 아주 거친 음색으로 블루스 바가 터져나갈 기세로 내지르는 공연이었다. 그것도 두 시간이 넘게 지치지도 않게 연속으로 할 수 있는 그 힘과 정열은 놀라웠다. 입장료와 맥주까지 해서 15불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이었다.
음악에 한참 빠져 있다가 주위를 살펴보니 백인 중장년이 주된 손님이었다. 동양인은 우리 셋과 앞 테이블의 일본인 네 명이 전부였다. 음악이 흥겨워지자 한두 노인 커플이 무대 근처로 나와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끈적하게 몸을 밀착시킨 채 추는 춤이었다. 옛날 디스코텍에서 부르스타임에 추는 것보다 훨씬 강도가 높고 빠른 템포였다. 아마 그 분들의 그날 밤은 아주 뜨거웠을 것 같다.
시카고에 다시 올 기회가 생긴다면 반드시 블루스 바 순례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날 블루스 바 체험으로 블루스에 더욱 빠지게 되었다. 이제 내 기억 속의 시카고는 블루스다. 블루스바 하나를 가지고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클래식보다 블루스는 확실히 노동자 계급 문화에 가까웠다. 그날 보았던 손님 중에 하루의 노동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려 들른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도 있었다. 분위기가 고상한 상류층이 찾기에 적합해 보이지는 않더라. 그런 동네 사람들과 관광객이 아마도 이 가게의 주 고객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