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아하는 재즈가수는 “엘라 피츠제럴드”지만 음색이나 감정표현은 “빌리 홀리데이”가 더 풍부한 거 같다. 빌리 홀리데이 전기영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된 후에 당장 빌려서 보았다. 누구보다도 인생의 굴곡이 심했던 빌리 홀리데이의 인생이 다소 밋밋하게 그려진 게 아쉽다. “라비앙 로즈”처럼 에디트 피아프의 음악보다는 사랑에 초점을 맞췄다. 극영화이기 때문에 흥행성 있는 사랑 이야기를 넣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빌리 홀리데이가 함께 공연한 카운트 베이시, 듀크 엘링턴, 베니 굿맨, 테디 윌슨 등 전설적 인물이 모두 빠진 건 여전히 허전하다.
모타운 출신 다이애나 로스가 해석한 빌리 홀리데이는 독특한 시각이 있다. 장르는 다르지만 흑인 음악이라는 뿌리를 공유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린 경험은 비슷하다. 하지만 다이애나 로스가 빌리 홀리데이의 깊은 내면을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런 우려와 달리 다이애나 로스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좋은 성적을 보였다. 빌리 홀리데이와 외모나 음색도 전혀 닮지 않았지만, 상당히 깊이 있는 내면의 바닥까지 내려간 건 사실이다.
빌리 홀리데이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권하고 싶은 영화다. 가난한 가정에 태어난 빌리 홀리데이는 먹고살기 위해 창녀촌에 일하기도 했고 하녀로 살기도 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은 뜨거웠고 조그만 클럽에서 노래하기 시작해서 나중에 카네기 홀에서 공연도 하게 되었다. 그녀의 인생 가운데 이 영화에서 주목한 경험은 백인 밴드와 남부 순회공연이다. 그녀가 경험한 미국 남부 40년대 흑인 인권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KKK가 대낮에 흑인을 집단폭행하고 나무에 목매달아 죽이는 일이 흔했다. 기괴한 시체가 과일 열매처럼 매달린 것을 보았던 경험은 그녀의 노래 “Strange Fruit”으로 다시 태어났다.
인종분리정책 때문에 백인 밴드와 함께 식당에 갈 수도 없었다. KKK단원과 맨몸으로 맞서다가 얻어맞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 강간당한 불행한 경험을 했다. 결혼생활 역시 평탄하지 못해서 세 번이나 결혼했는데 영화에서는 비교적 행복했던 결혼만 다룬다. 개인적 불행과 불우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내면적 평화를 찾은 곳이 불행히도 마약이었다. 결국 마약 때문에 비참한 죽음까지 이르게 되지만 영화는 그걸 다루지 않는다. 영화의 결말은 불행을 딛고 재기한 카네기 홀 공연으로 끝난다.
빌리 홀리데이를 모창하는 게 싫어서 다이애나 로스는 자신의 방식으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다이애나 로스가 노래를 잘 부르긴 했지만 빌리 홀리데이 수준은 못 된다. 그녀의 독특한 해석을 높이 평가할 만 하지만 영화 보는 내내 이건 빌리 홀리데이 노래가 아니라는 생각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빌리 홀리데이 노래도 다이애나 로스의 노래도 아닌 어느 클럽에서 노래 잘 부르는 가수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레이”나 “라비앙 로즈”처럼 원곡은 쓰는 방식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15살부터 중년까지 모두 연기한 다이애나 로스의 외모는 정말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음반을 듣던 소녀의 모습이나 약에 취해 화장실에 멍하니 앉아있는 표정이 모두 다이애나 로스였다. 빌리 홀리데이의 화신이라고 보이지는 않지만, 불행했던 가수의 인생이 이 영화에 담겨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다시 빌리 홀리데이 음반을 들었다. 거친 음색 속에 담긴 그녀의 불행한 과거와 감정의 떨림까지 느껴진다.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은 자유로웠을 것만 같다. 그녀는 발아래로 감당할 수 없었던 불행을 흘려보내고 훨훨 날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