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류층 소비 문화와 미술 전시회

‘내조의 여왕’ 12회를 보다가 이 장면에서 웃음이 터졌다. 김 이사의 부인(나영희)이 회사 주관 미술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을 제출한다. 작품을 공개하면서 창작 동기를 아래와 같이 장황하게 설명한다.

 이 그림의 제목은 샤핑입니다. 샤핑을 나설 때 전 생각하곤 하죠. 빽을 살까, 선글라스를 살까, 구두를 살까? 그 혼란과 혼돈 속에서 백화점에 도착하지만 일단 그 공간 안에 들어서면 마음이 정화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분명해지죠. 그날 제 영혼을 끌어당기는 물건을 향해, 자석에 쇠붙이가 이끌려가듯이 가보면, 그것이 바로 제가 사야 할 물건들이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심리상태를 ‘작품’으로 표현해봤습니다.

경제위기로 실업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세상에서 한가하게 쇼핑이나 하면서 드는 고민을 예술작품으로 내놓는다. 세상사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한가한 시간이면 무얼 사야 할지 고민에 잠기는 상류층 소비문화는 서민의 눈에는 사치다. 나영희는 능청스럽고 진지한 어조로 상류층 부인을 연기하며 그 내면을 대중 앞에서 까발린다. 경제위기와 무관한 상류층 부인이 하는 개인적 고민은 ‘샤핑'(쇼핑)이다. 용산 재개발 참사로 무고한 서민이 생명을 잃더라도, 언론 통제를 비판하던 뉴스 진행자가 물러나도,  그녀에겐 쇼핑 고민이 가장 중요하다. 평민들이 당하는 고통 따위는 그녀가 그리는 그림의 대상도 되지 못한다.

김 이사 부인의 연설은 사람들의 웃음거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별다른 사고 없이 전시회를 마친다. 그녀의 지위가 이사의 부인이기 때문에 그녀의 생각에 딴지를 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회사 부인회의 도움으로 김 이사의 부인은 작품을 성공적으로 판다. 그녀의 천박한 물질주의 소비관은 풍자의 대상이 된다. 다른 상류층이 그녀를 비웃는 이유는 물질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태도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도 소비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닐 것이다. 세련되게 그걸 포장하지 못한 게 문제다. 그런 면에서 김 이사 부인은 오히려 소비하는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표현한 푼수에 속한다.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엘리트 상류층을 지칭하는 영어 단어로 ‘파워 엘리트’가 있다. 이 말은 ‘찰스 라이트 밀스’라는 미국 사회학자가 엘리트 계층을 풍자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고안한 단어다. 밀스는 대다수 평민의 의식과 전혀 다르고 사회적 책임 의식도 없지만 어떻게 파워 엘리트가 대중을 지배하는지 그의 책을 통해서 서술하고 있다. 그가 비판하려는 파워 엘리트는 구체적으로는 사회적 특권의식에 젖은 1950년대 앵글로색스계열 백인 개신교 남자다. 포괄적으로 따지면, 대중과 유리된 채 엘리트 집단의 특권 의식만 누리면서 미국 역사를 지배한 파워 엘리트까지 포함한다.

국내 어느 대학을 방문했을 때 ‘파워 엘리트’를 양성에 최선을 다한다는 플래카드를 걸어놓은 걸 본 적이 있다. 그 문구에서 ‘파워 엘리트’는 밀스가  쓴 풍자적 의미는 사라지고 그냥 사회의 지도층을 키운다는 뜻으로 바꿔 쓴 것이다. 과연 그 학교가 엘리트가 누리는 특권 의식에 대한 성찰이나 사회적 책임 의식까지 가르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자본주의가 강화되면서 다양한 엘리트 계층 가운데 특히 경제적 엘리트가 힘을 얻고 있다. 김 이사 부부가 속한 경제적 엘리트 계층의 수준이 어느 정도일까? 비록 극적으로 구성한 드라마라고 하더라도 한국 사회의 경제적 엘리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납세, 병역 등 의무를 가장 이행하지 않는 계층도 바로 이들이다. 기부나 사회적 환원의 비율도 다른 OECD 국가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전시회를 여는 곳은 퀸즈푸드 사장 부인이 운영하는 미술관이다. 이는 기업 홍보와 문화를 통한 사회 환원의 이미지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있다. 기부와 사회 환원에 인색한 부정적인 기업 이미지를 한꺼번에 개선할 수 좋은 전략이다. 부와 이익만 탐하는 기업의 물질적 가치를 미술이라는 문화적 가치로 슬쩍 가리고 포장할 수 있으니까, 당장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미술관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미술품이 이미 고가상품으로 거래되고 있으니 투자가치도 있다. 상류층의 허영 같은 소비문화를 풍자하기 위한 공간으로 미술관 만큼 폼나는 곳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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