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중세는 ‘암흑의 시대’라고 알려졌지만, 변화와 갈등이 살아 꿈틀대는 시대였다. ‘자크 르 고프’ 같은 중세 역사학자들은 중세 일상사와 미시사를 통해서 그 시대를 해석하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줬다.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라는 해석 이외에도 다양한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장미의 이름’은 1327년 이탈리아 북부 한 수도원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을 다룬다. 나는 이 살인 사건의 해결보다는 배경에 깔린 중세를 이해하는데 더 관심이 있었다. 그 살인 사건 미스터리도 중세라는 시대를 먼저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은 역사적 고증을 거쳐 미세한 배경도 중세에 가까운 모습으로 재현한다. 살인사건의 미궁과 더불어 암흑에 갇혔던 중세의 모습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이 영화는 이탈리아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가 쓴 소설을 각색해서 만들었다. 미세한 기호도 놓치지 않으려는 기호학자의 집념 때문에 영화로 그 모습을 살리는 데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수도원, 농가에 대한 사물 묘사도 뛰어났지만, 농민과 교회의 대립이나 교회 내부의 교리분쟁 그리고 이성과 광기의 대립을 빼놓지 않고 서술하고 있다.
악마의 저주라는 수도승의 주장은 중세를 폭풍 속으로 몰아넣었던 ‘마녀사냥’과 깊은 연관을 지닌다. 농민 여자는 억울하게도 마녀로 몰려 화형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근거 없는 주장도 교회의 권위를 업으면 진리가 되던 세상이었다. 검은 닭과 고양이는 악마 숭배의 근거가 되어 결백한 수도승도 악마 숭배자로 낙인찍어 버린다.
이 살인사건을 맡은 윌리엄(숀 코널리)과 그의 제자 아조(크리스챤 슬레이터)는 과학적 논리로 해결하려는 이성주의자다. 이들은 종교에 맞서 대결하는 과학을 상징한다. 종교의 압도적인 지배에 여전히 눌려있지만 지치지 않고 과학의 논리를 펴고 있던 중세의 움직임을 드러낸다. 검사관 버나드 구이(머레이 아브라함)는 교회의 권위로 윌리엄의 조사를 부정한다. 윌리엄과 구이의 대립을 통해서 중세가 겪는 갈등을 짐작할 수 있다.
가난에 고통받는 평범한 농민들도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이들은 교회의 부당한 권위에 저항하고 있다. 14세기 수도원의 살인사건은 바로 서로 다른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에 있다. 부귀영화를 누리며 교회의 권위에 집착한 세력과 예수님도 가난했다며 그 실천을 부르짖었던 세력이 싸운다. 신에 대한 해석에 빠져 현실을 외면했던 세력과 고통받는 농민 대다수는 변화하는 시대에 빠르게 반응하고 있다.
윌리엄과 아조는 홈즈와 왓슨을 연상시킬 만한 탐정이다. 미신과 비이성을 거부하고 과학과 이성으로 살인사건을 해결했던 홈즈는 새로운 시대의 인물이다. 이들의 시대가 오려면 아직 멀었지만, 중세 안에서 싸우던 새로운 가치를 지닌 인물들의 투쟁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윌리엄은 학자나 과학자에 가까운 면모를 보여준다. 윌리엄은 구이의 무시무시한 권위에 대항해서 자신의 논리를 펼친다.
살인사건의 의혹은 결말에 풀리지만 기억 속에 담아둬야 했다. 새로운 시대가 오려면 더 많은 윌리엄과 아조 그리고 농민이 필요하다. 암흑의 중세, 안개 속 수도원은 서서히 밝아오는 아침을 막으려고 살인을 저지르지만, 변화의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장미의 이름’은 다양한 중세의 기호가 잘 정돈된 도서관이다. 겉으로 드러난 살인사건 내부에는 기호의 치열한 투쟁이 깔려있다. 기호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그 시대의 반영이며 현실이다. 이 작품은 중세 속으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