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은 브라질의 한 감옥이다. 그 당시 남미는 독재정권들이 군대, 경찰, 감옥 등으로 국민에게 공포정치를 떨치고 있었다. 영화 ‘거미 여인의 키스’는 그 시절을 직접 경험했던 남미 사람뿐만 아니라 독재정권에 탄압을 받았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영화다.
정치범에 가해지는 끔찍한 고문 같은 비인간적 행위가 영화에 전면으로 주목받지는 않는다. 대신에 감옥이라는 공간 속에서 망가진 인간을 보여주며 환상에 빠질 수밖에 없는 비열한 현실을 느끼게 한다. 정치범 발렌틴(라울 줄리아)이 서서히 영화 속에서 파괴되어 과정을 비교적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의 다른 중심 인물은 바로 동성애자 몰리나(윌리엄 허트)다. 정치범과 동성애자는 현실 속에 어울리기 힘든 부류다. 게다가 몰리나는 발렌틴에게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교도소장에게 사주를 받고 있다.
서로 어울리지 못하던 몰리나와 발렌틴을 이어주는 것은 몰리나가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영화가 아이러니하게도 나치 선전 영화였다. 물론 몰리나가 주목한 것은 전쟁의 낭만적인 사랑이었다. 처음에 발렌틴도 나치 선전물이라고 혐오하던 영화였지만 그 이야기에 점점 빠져든다. 망가진 육체와 정신을 잠시라도 위로해주는 사랑 이야기에 끌린 것이다. 혁명가가 나치 선전영화에서 위로를 얻어야 하는 현실이 참 서글프다.
전혀 다른 부류의 두 인물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 영화는 아르헨티나 소설가 마누엘 프이그의 1976년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감옥이라는 공간이 주 무대라서 연극적 느낌이 강하다. 이 작품은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이미 연극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영화가 만들어진 이후에 시카고를 쓴 존 캔더와 프래드 에브가 1993년에 뮤지컬로 만들었다.
다양한 매체로 제작될 만큼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아마도 몰리나의 인간애 때문일 것이다. 화려한 장신구로 방을 꾸미는 일을 열심히 하였고 정치에 관심조차 없었던 그가 이성애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위해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비인간적 사회에 극적으로 대비되는 인간애는 아름답다. 윌리엄 허트는 몰리나 연기로 아카데미, 칸느를 비롯한 각종 영화제에서 남우 주연상을 받았다.
현대 사회는 여전히 정치적 자유나 성적 자유에 억압적이다. ‘거미 여인의 키스’의 감옥 현실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한다. 이 영화에 대한 다른 평을 찾아보다가, 정치범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하지만, 동성애자를 ‘호모’라는 혐오적인 표현을 서슴없이 쓰는 것에 무척 놀랐다.
혁명을 꿈꾸던 저널리스트 발렌틴과 사회에서 소외된 동성애자 몰리나의 우정이 그래서 더욱 빛을 발한다. 오랜 세월 사랑을 받을 영화가 될 것 같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그 둘을 가둔 감옥의 철문이 더욱더 차갑고 잔인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