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소설가 폴 오스터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이 있어서 흥미 있게 읽었다. 1968년 뉴욕 콜롬비아 대학에서 있었던 학생시위에 관련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정리한 글이다.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폴 오스터는 베트남전과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시위에 우연히 끼어들게 되었다. 그는 대단한 사회의식을 가지고 시위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그렇다고 강요당한 것도 아니었고, 공감해서 자발적으로 참여했는데 일이 의도한 것보다 커지게 되어서 본인도 놀랐다고 한다.
그 글에서 나를 자극한 부분은 폴 오스터의 과거를 바라보는 눈이었다. 비록 화가 나서 한 행동이었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화가 났지만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 61살이지만, 내 생각은 피가 끓고 불이 타던 1968년 그대로다. 이 방에 홀로 앉아서 펜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나는 아직도 화가 나 있음을 느낀다. 아마도 그때보다 지금이 더 화가 난다. — 폴 오스터, 뉴욕타임스, 2008년 4월 23일
폴 오스터는 베트남전과 이라크전을 암시적으로 비교하는 여운을 남기며 글을 마무리 짓는다. 폴 오스터가 사회적 의식이 강한 정치적 작가는 아니지만 60년대 세대의 공통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반전 평화운동과 시민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던 시기였다. 그가 만일 60년대를 헛된 시기로 기억하고 후일담 같은 글을 썼더라면 나는 화가 났을 것이다.
90년대에 386세대 소설가가 쓴 사회운동에 관한 소설이 한동안 인기였던 적이 있었다. 그런 소설들을 읽으면서 나는 늘 불편했다. 사회운동에 관한 추억담이나 후일담이었고 주인공들은 향락이나 개인사에 빠져서 허우적댔다. 과거는 그냥 어리석은 치기에 불과했다고 바라보는 시선이 불쾌했다. 청년은 죽기 직전의 노인처럼 폭삭 늙어버렸다. 과거를 달관한 자세가 멋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나는 그게 달관이 아니라 포기로 느껴졌다.
과거를 무조건 아름답게만 기억하는 것도 현실 도피적이라 마음에 들지 않지만, 과거를 나쁘게만 기억하는 것도 역사 도피적이다. 과거에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면 된다. 과거 없이 현재는 존재할 수 없다. 과거를 담담히 품은 현재의 성숙한 모습이다.
과거를 하찮게 여기는 자들은 쉽게 변절자가 된다. 60살이 넘어서도 과거를 자랑스럽게 간직하는 폴 오스터의 태도가 부럽고 아름다워 보인다. 과거를 잃어버린 늙은이가 넘쳐나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