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국 단편소설이 읽고 싶어져서 도서관에서 단편 모음집을 빌렸다. 가람기획이라는 출판사가 평론가 53명에게 설문하여 현대 단편소설 20편을 묶어서 책으로 완성했다. 기왕에 설문하는 김에 100명을 채워서 했으면 어땠을까. 왜 53명인지는 그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아서 알 수 없어서 아쉽다.
이 책에서 설명한 선정기준에 따르면, 우선 평론가 20명에게 1차 목록으로 100편 정도 뽑았다. 그 목록을 다시 평론가 53명에게 돌려서 설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평론가 1명이 몇 편까지 뽑을 수 있는지 등 자세한 절차는 드러나 있지 않았다.
내가 만일 이런 목록을 선정한다면 1차 목록까지만 평론가들이 뽑고 나머지는 독자들을 상대로 설문을 돌렸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 책은 평론가들의 취향이 많이 반영되어 있었다.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이 많이 뽑힌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마도 일반 독자들이 선정했다면 많이 달랐을 것이다.
한국 현대 단편소설 20 (빈도순)
- 김승옥, 무진기행 (48)
- 황석영, 삼포 가는 길 (46)
- 이상, 날개 (42)
- 김동리, 무녀도 (41)
- 박완서, 엄마의 말뚝 (39)
- 이청준, 눈길 (37)
- 이문구, 관촌수필 (36)
- 조세희, 뫼비우스의 띠 (34)
- 이문열, 금시조 (31)
-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30)
- 김유정, 동백꽃 (27)
- 오정희, 파로호 (27)
- 현진건, 운수 좋은 날 (26)
- 김동인, 감장 (25)
- 황순원, 소나기 (25)
- 임철우, 아버지의 땅 (24)
- 손창섭, 비 오는 날 (24)
- 서정인, 강 (23)
- 김원일, 미망 (22)
- 이태준, 복덕방 (20)
‘운수 좋은 날’, ‘엄마의 말뚝’, ‘복덕방’은 이미 읽었고 틈나는 대로 몇 편을 더 읽어볼 작정이다. 세월의 힘이 견디고 당당히 서 있는 단편작품들이라 그런지 다시 읽어도 감탄이 나온다. 탄탄한 문장력이나 깊이 있는 주제의식은 현대 한국사를 잘 표현하고 있다.
위의 목록에 선정된 소설 중에 못 읽어본 작품도 꽤 된다. 오정희의 ‘파로호’나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이나 서정인의 ‘강’은 읽어볼 기회가 없었다. 이번 기회에 한 번 읽어 봐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단편 소설 3편을 뽑아봤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하근차의 ‘수난이대’, 전영택의 ‘화수분’이다. 단편은 마음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작품이 인상적이다. ‘운수 좋은 날’은 죽은 어머니의 빈 젖을 빠는 아이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수난이대’는 전쟁통에 다리를 잃은 아들을 업고 강을 건너는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다. 화수분은 추운 들판에 얼어 죽은 부부 사이에 놓인 아이가 생각난다.
단편 소설보다는 장편을 더 좋아하는 편이지만, 단편은 간결한 즐거움이 있다. 마치 시처럼 짧지만 울림이 있는 단편은 오래도록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