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롭게도 2006년 버라이어티지에서 VHS 부고 기사를 실었다. DVD가 1997년 데뷔한 지 10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2003년을 기점으로 DVD는 VHS의 매출을 넘어섰다. 더는 VHS로 출시되는 영화는 없다. VHS는 30세의 나이로 시장에서 사라지라는 사망선고를 받았다.
VHS는 Video Home System (Victor Helical Scan 또는 Vertical Helical Scan)의 약자로 1976년에 태어났다. VHS는 태어나면서부터 험난한 운명에 직면했다. 1975년에 먼저 탄생한 베타맥스와 한판 대결를 벌여야 했다. 가까스로 베타맥스와 싸움에서 승리한 VHS는 1980년대에 다시 레이저디스크와 진검승부를 겨뤄야 했다. 이 대결에서도 VHS는 건재했지만, 최첨단 디지털 신기술로 무장한 DVD에 결국 지고 말았다. 비록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지만 VHS는 30년을 버틴 장수 기술이었다.
역사적으로 VHS는 사람들의 매체 경험을 바꿔 놓았다. VHS의 등장으로 영화를 극장이 아닌 집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관객들이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인상 깊은 장면을 되감아 보거나 빠르게 앞으로 돌릴 수도 있었다. 영화에 대한 통제가 영화관이 아닌 개인의 손에 달렸다. 그리고 영화를 개인이 소장하는 경험을 마음껏 누리게 해주었다.
VHS는 보고 즐기는 것만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VHS로 처음 단편영화도 찍어봤다. 그리고 나의 결혼식도 VHS에 담겨있다. 마음에 드는 영화의 장면만 따로 VHS에 모을 수도 있었다. 창작과 편집에 편리한 VHS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VHS의 단점도 상당했다. 아날로그 매체의 특성상 반복해서 보면 테이프가 늘어나서 못 쓰게 된다. 실수로 지우고 다른 영상을 덧입힐 수도 있다. 소중한 결혼식 테이프에 월드컵을 녹화하는 실수를 상상해보자. 그리고 마그네틱은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습기나 햇빛에 노출되면 걷잡을 수 없다.
DVD는 디지털이라서 VHS보다 오래 버틸 수 있다. 빨리 감기나 되감기 할 필요도 없다. 메뉴로 들어가서 원하는 부분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다. 영상도 더 선명하고 음악도 더 실감 나게 즐길 수 있다. 실수로 기존 영상을 지울 염려도 없다. VHS의 단점을 개선한 DVD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며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물론 DVD도 단점이 있다. 가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영상을 보여주려면 여간 복잡하지 않다. 강제종료할 수 없는 FBI 경고문도 다 봐야 하고, 메뉴로 들어가서 챕터를 찾아서 앞이나 뒤로 번거롭게 더 뒤져야지 정확히 원하는 화면을 찾을 수 있다. 반면에 VHS는 미리 원하는 부분을 찾아서 교실에서 바로 보여줄 수 있다. 그리고 DVD는 복제할 수 없어서 교육용으로 편집해서 학생들에게 보여줄 수도 없다.
아직 집에는 DVD와 VHS 겸용 플레이어가 있다. 가끔 도서관에서 VHS를 빌려다 보기 때문에 현재 플레이어로 당분간 유지할 계획이다. 집에 보유하고 있는 VHS도 좀 되기 때문에 쉽게 버리기 어려울 전망이다.
나의 영화 보기와 VHS는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영화관에서 본 영화들도 VHS로 다시 빌려봤고, 옛날 영화는 거의 VHS로 봤다. 비디오 재생기도 헤드가 나갈 정도로 여러 개 바꿨다. 이사할 때마다 괜찮은 비디어 대여점을 가장 먼저 찾았다. 근처에 없으면 버스를 타고 가서 빌려오기도 했다.
비디오광이었던 나에게 가장 무서운 영화는 당연히 일본 영화 ‘링’이다. 비디오에서 귀신이 나오다니. 그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비디오를 빌려보지 못했다.
비디오와 함께 시작했던 나의 영화 인생은 DVD로 갈아타고 있다. 나중에는 DVD도 사라지고 다운로드나 스트리밍 영화를 보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하지만 비디오를 플레이어에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던 나의 경험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