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관한 텔레비전 시리즈를 보면서 그리스 로마의 역사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마침 스파르타 전쟁을 다룬 영화 ‘300’이 있길래 망설임 없이 빌렸다. 비평가들의 평도 좋았고 관객들도 만족스럽다는 입소문 때문에 안심했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거의 졸기 일보 직전이었다. 팔다리가 무자비하게 잘려나가는 잔혹한 전투 장면이 이렇게 졸리다니. 이렇게 비평가와 관객의 평과 다른 경우는 드물었다. 그들의 평을 뒤져보았고 나와 비슷한 견해를 공유한 이들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실종된 서사
이 영화는 철저하게 전쟁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기본 인물 간의 갈등도 없이 단순한 선악의 대결구조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의 군대가 그리스의 도시국가 스파르타로 쳐들어온다. 이를 지키기 위해서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300명의 특공대를 이끌고 전투에 임해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다. 이게 이 영화에 존재하는 유일한 서사구조이자 뼈대이다. 나머지는 시종일관 ”스파르타’, ‘자유를 외치는 개성 없는 디지털 인간들만 차고 넘친다. 특히 스파르타를 외치는 이유조차 불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스파르타의 군대는 마치 같은 헬스센타에 튀어 나온 몸짱들이다. 이와 반대로 페르시아 군대는 흉측한 괴물들이나 이상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다. 이들은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왔던 기괴한 괴물이 역사 시대로 튀어나온 것 같다. 페르시아의 왕은 쇠붙이를 온몸에 피어싱한 변태성욕자로 그린다. 이쯤 되면 세 살 먹은 아이가 보더라도 누가 악당이 쉽게 알아맞힐 수 있다.
각 진영 내부에 갈등도 전혀 없고 인물들은 평면적이기만 하다. 이게 지루한 원인 중의 하나였다. 스파르타 도시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설득력 없이 진행된다. 서사 구조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인물들 간의 갈등이나 감정이 드러나야 하는데 디지털 이미지로 보여주려고만 한다. 스파르타의 왕이 어둠 속에서 늑대와 싸우는 장면 하나로 현재 상황을 설득시키려 한다.
과잉된 이미지
과도한 디지털 이미지는 눈의 피로를 가중한다. 사진으로 치면 포토샵으로 과도하게 대비 효과를 줘서 비현실적인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이게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의 배경은 게임 속의 한 장면 같다. 그리스의 배경을 연상시킬만한 장면이 없다. 지나치게 검고 하얀 이미지들이 전달하고자 한 것은 메시지가 아니었다. 아쉽게도 나는 그 이미지도 멋지게 다가오지 않았다.
머리가 잘려나가고 피가 솟구치는 장면들이 많았지만 어떤 것도 현실적이지 않았다. 너무나 깔끔하게 처리된 특수효과와 디지털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게임 속에 있는 듯한 느낌만 들었다. 게이머들을 겨냥한 영화가 분명했다. 영화의 예고편에 다른 영화보다 게임 광고가 더 많았다. 이런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전쟁의 허무 같은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았다. 소수의 전사의 강인한 몸으로 아랍 세계의 적군을 처치하는 임무 수행 게임이다.
지나친 슬로우 모션의 사용은 이 영화가 이미지에 치중하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거의 모든 전투장면은 슬로우 모션으로 촬영했다. 심지어 신전의 사제가 점을 치는 장면도 슬로우 모션이다. 디지털로 시간을 늘이다 보니 영화적 시간은 다시 비현실적이 된다.
이라크전의 은유
이 영화가 아무리 역사 판타지를 표명한다지만 아랍세계에 대한 악의적 묘사는 상당히 불쾌했다. 영화 속 스파르타의 왕은 현재 테러리스트와 싸우는 부시이고, 페르시아의 왕은 미국에 반대하는 빈 라덴을 비롯한 아랍의 테러리스트이다. 아랍세계는 비문명적이며 사악한 괴물들의 집단이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이렇게 적대적 묘사한 저의가 무엇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의 죽음에 대한 그리스군의 반격으로 채워진다. 마치 미국이 앞장선 전쟁에 모두 동참하라는 식의 은유를 담고 있는 듯하다. 포스트모던한 이미지를 내세우고 있지만 결국 절대 악의 축에 맞서 분연히 일어나라는 전근대적 메시지를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그리스 역사극의 기대했지만, 아랍인에 대한 적대감을 심어주는 게임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몇 년 전 국경을 넘는 멕시코인을 총으로 쏴 죽이는 노골적인 미국의 게임이 사회적 문제가 된 적 있다. 이 영화는 지능적으로 역사의 은유를 통해서 서구인의 아랍인에 대한 적대감을 해소하는 건 아닐까?
이 영화의 이미지에 열광하는 관객이 디지털 세대라면, 나는 서사구조로 영화를 보는 아날로그형 인간인가? 이 영화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보려는 나의 노력은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걸까? 인물과 이야기가 사라진 영화는 게임에 더 가깝다. 300은 그런 점에서 아쉬운 영화다. 잘 만든 게임은 서사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