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대학 시절 수업과제로 제출한 글이다. 지금 다시 쓴다면 전혀 다른 글을 쓰겠지만 기록을 위해 이 블로그에 옮겨 본다.
짧은 기간이지만 내가 영화를 보아온 편력은 상당하다고 자부한다. 싸구려 삼류 극장을 전전하며 미성년자 관람 불가의 영화를 보면서 나의 호기심은 상당히 자극되었다. 주로 중/고등학교 시절에 보았던 영화는 애마부인 시리즈 부류의 에로영화나 홍콩 갱영화가 대부분이었다. 몰래 훔쳐본다는 기분 때문인지 아슬아슬한 전율을 자주 느꼈다. 수업을 빼먹고 영화를 보러 간 날에는 큰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그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이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것 같았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커지는 해방감에 심취하여 나중에는 거의 중독이 되었다. 특히 자율학습에서 도망쳐 심야 영화를 보고 나서 집으로 오는 길은 색다른 세상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시에 내가 영화에서 찾은 의미는 숨막히는 대입 준비의 일상에서 벗어나 일탈과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고 그 일상 속에서 만족감을 느낄 수 없는 나에게 영화는 일종의 해방구였으며 깨어나기 싫은 꿈이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당시 영화가 지니는 의미가 가히 긍정적이었다고는 볼 수만 없었다. 영화는 적응하기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숨도록 권유하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면 현실을 잊었고, 영화 속으로 숨어 들어간 것이다.
어린 시절 보았던 영화 속의 주인공은 나를 편하게 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인물이 더 많았다. 그때 보았던 영화를 두 범주로 나누면, 환상적인 영화와 현실적인 영화가 있다. 처음으로 나를 환상에 진하게 젖게 만든 영화는 ‘마네킹’이라는 영화이다. 배우가 누구고, 감독이 누구인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마치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 환상에 흠뻑 젖어 들었다. 이집트의 여인이 저주를 받아서 마네킹에 혼이 깃들여 있다가 자기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남자를 만나면 사람으로 환생한다는 흔히 볼 수 있는 전설에 해피엔딩을 가미한 전형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환상영화이다. 객관적인 영화비평을 하기 전에 이런 부류의 영화는 일단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비록 짧은 시간의 현실도피이지만 다시 현실로 복귀할 힘을 줬다.
또 다른 범주의 영화는 사실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인데, 대부분 인물이 범죄자, 창녀, 병자 등 밑바닥 인생을 산다. 이들은 내가 감정 이입할 수는 없지만, 순간적으로 나와 동일시되는 모습을 발견할 때 나는 극장을 뛰쳐나오곤 했다. 그들의 삶이 전혀 별개가 아니라 바로 나의 삶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나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였다. 극장을 벗어나 거리를 거닐며 그 인물의 감정에 빠져서 나를 비우고 돌아오곤 했다.
현실적인 영화와 환상적인 영화를 보면서 나의 감정의 완급을 조절하며 영화 보기는 계속되었다. 그 당시 나는 아무래도 현실을 직시하는 영화보다는 현실을 잊게 만드는 영화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못 견딜 것 같았다. 영화는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대지의 어머니처럼 상처받고, 흔들리는 나를 아무 조건 없이 품어 주었다. 현실의 고단한 내 모습을 벗어나 신화적인 세계에 머무르는 시간만이 나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내가 즐겨가던 대전의 ‘서라벌 극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신전의 입구처럼 신성한 공간이었다. 특히 늘 눅눅해진 의자에 몸을 기대는 느낌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의자에 앉아 어둠 속에 나를 숨기고 스크린에 빨려들어 갈 수 있었다. 하얀 스크린은 극장의 어둠을 삼켜버리고 새로운 빛깔의 세상을 열어주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 내가 어둠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할 수 없었고, 나의 세계는 오로지 스크린 안에 완벽하게 실현되어 있었다.
나는 쉽게 영화 속의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동화할 수 있었다. 영화관에 가기 전에 항상 마음속으로 그렇게 다짐하고 준비를 했었다. 나는 소피 마르소, 부룩 실즈, 피비 케이츠를 내 우상으로 만들었고, 그들의 영화를 접하면서 그들을 나의 세계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딱히 기억에 떠올릴 만한 영화는 없지만, 배우를 좋아했던 그 느낌, 감정만은 아련하게 기억이 난다. 특히 내가 좋아했던 소피 마르소의 영화 ‘라붐’, ‘유콜 잇 러브’ 등은 혼자서 여러 번 보기 위해 남아 있었고, 그 후에도 몇 번 극장에 다시 갔었다. 많은 사람은 한 번 본 영화는 다시 극장에서 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예전부터 마음에 들었던 영화는 몇 번이고 시간이 나면 찾게 되는 묘한 습관이 있다. 그것은 이미 나의 몸에 배어 하나의 관습처럼 반복되고 있다. 대사를 외우고, 영화 음악을 흥얼거리며 거기에 어울리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영화가 현실에서 실현되기를 기대하였다.
영화를 좋아하는 계기가 된 것은 아름다운 배우를 만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현실에서 친구가 없어서 외로움을 느끼던 나는 영화 속에서 소피 마르소를 만나며, 그녀의 사진을 모으고, 잡지 인터뷰 기사를 스크랩하며 근처에 있는 것처럼 살고 싶었다. 종종 꿈을 꾸면 그녀가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갔고, 거기에서 즐겁게 어울렸다. 이때 나는 사실상 그녀와의 연애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에 꿈에서 성취되었다고 믿었다. 인물을 좋아하게 되자 그녀가 영화 속에서 했던 캐릭터에게도 정이 갔다. 그녀가 맡은 역할을 대부분 십 대 소녀의 작은 방황을 다루고 있었다. 프랑스 십 대 집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나는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혼한 가정에서 어머니와 사는 딸, 집에서 파티하며 남녀가 어울리는 모습, 자유분방한 생활 등은 동양적 세계관에 물든 나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를 좋아한다면 그녀의 주변 환경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하고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그녀를 인정했지만 좋아하는 나의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이 무렵 나는 사랑이라는 것의 정의를 나름대로 내리고 있었다. 사랑은 상대방이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사랑과 같은 것이었다.
영화 보기를 연애라 생각하면 나의 연애 편력은 상당하다. 컬트영화, 홍콩영화, 호러영화, 할리우드영화, 초현실주의영화를 보면서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있었다. 영화 보기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다양한 배우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소피 다음으로 알게 된 배우는 프랑스의 샤를로트 갱스부르였다. 그녀는 소피처럼 화사한 아름다움은 없지만 강한 내면의 눈빛을 가졌다. 그녀는 소피가 했던 주인공과는 달리 어둡고 암울한 역을 주로 맡았다. 미혼모, 도적, 마약 환자, 비행 소녀의 역을 주로 맡았는데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녀의 매력은 나를 압도하였다. 현실적인 삶의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항하는 모습은 나에게 결여되어 있는 부분이었다. 나는 그녀를 좋아했다기보다 그녀를 부러워했다. 그녀의 과감한 행동은 나에게 영웅의 행동이었다. 그녀의 인생은 할리우드영화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고 비극으로 나를 울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비극은 나에게 계속해서 연민의 감정을 만들어줬고, 나를 현실로 내모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는 그녀에게 용기와 반항을 배웠다. 나는 그동안 나의 현실도피적 성향을 청산하고 현실 속으로 뛰어들기로 작정하였다. 세상에 널려있는 두려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가 나에게 던져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살다 보니 어느새 많이 달라졌다. 항상 사람들 곁에서 겉돌고, 함께 어울리지 못하던 내가 소외를 극복하고 사람들의 물결에 섞이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녀의 사진이 들어있는 코팅지를 보며 고마워한다. ‘귀여운 여도적’의 그녀가 나에게 아직도 말을 거는 듯하다.
또 한 번 나를 변화시켜준 영화가 있다. 나는 내가 처음부터 잘못된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나를 지치게 했고, 나를 무기력하게 내버려 두었다. 나는 다리에서 주워왔으며, 나의 어머니나 아버지는 모두 나의 친모, 친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피해의식을 일깨우고 극복시킨 영화가 바로 ‘토토의 천국’이다. 이 영화는 내가 최고로 치는 영화이다. 나의 개인적인 체험을 일깨우고 가장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토토는 어릴 적 불이 났을 때 자신이 이웃집 부자 아이와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토토의 그런 생각은 차츰 구조와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나중에는 아예 종교적 교리처럼 믿어버린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환상을 통해서 욕구를 실현하려는 토토의 입장은 나와 너무 비슷하였다. 나의 어린 시절은 토토처럼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집에서 주로 누이 동생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방안에 놓여있는 장식 인형들과 어울려 놀면서 공상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사건이 이웃집과 연관이 되자 토토의 그런 환상은 더욱 극단을 치닫는다. 설상가상으로 토토는 사랑하는 누나를 잃어버리자 자기 삶의 의미는 완전히 사라진다.
지독한 상실감의 한가운데 토토의 청년기가 펼쳐진다. 그는 남들처럼 운동경기도 보러 가고, 거리를 산책하지만 왠지 기운이 없다. 그의 책상 위에는 어린 시절 누나의 사진이 놓여있다. 토토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지 못해 사는 셈이다. 그의 삶의 단상은 나를 씁쓸하게 만들었고,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토토의 피해의식과 나의 열등의식은 세상에 편입되기 힘들게 한다. 토토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만, 그것은 더 불행하게 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토토의 인생은 어린 시절, 청년 시절, 노년 시절, 그리고 영화 속의 모습으로 전개되어 펼쳐진다. 내가 토토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토토가 영화 속의 영화를 보며 느끼는 감정과 꼭 일치할 것이다. 토토의 인생은 바로 나의 인생의 축소판이며, 청사진 같은 것이었다. 토토가 마지막에 죽을 때 하는 독백은 모든 것을 깨우쳐 준다. 한 번도 인생의 주체가 되어 살아본 적이 없던 토토는 독백을 통해 자신의 모순을 들춰준다. 친구를 대신해서 죽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토토는 자신이 생각했던 환상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토토 인생의 파국은 내 인생의 새로운 활로를 열어 주었다. 토토가 끝내 극복하지 못한 문제를 정면으로 부딪쳐 보기로 하였다.
과연 토토가 꿈꾼 천국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토토가 만들어낸 환상을 통해서 천국을 보았다. 나의 천국은 너절한 피해의식을 벗어나 자유롭게 비상하는 세계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쯤 그런 이상을 가지고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콤플렉스에 얽매이지 않는 당당한 삶을 이상으로 본다. 토토가 전해준 메시지를 바탕으로 나의 세계를 만들어 왔다. 토토를 비롯한 영화에 관한 모든 것은 나의 인생을 변화시켰다. 영화배우, 영화 음악, 영화 캐릭터, 영화감독의 세계관을 통해서 나의 모순이 철저히 드러냈고, 때로는 그것을 극복했고, 때로는 여전히 고민한다. 영화는 나에게 있어 삶의 가르침을 주는 교육의 장이자, 바로 현실이었다고 자부한다. 견디기 힘든 현실에서 도피해 영화 속으로 숨었지만, 그 과정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힘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결국 나는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고 당당한 태도로 복귀하고자 한다. 영화는 끝나지 않고 영원히 반복되는 신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