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의 옷

2007년 9월 판 ‘그라모폰’에 이런 글이 실렸다. 음악 평론가인 해리엇 스미스가 공연장 객석에서 우연히 중년 부부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부부는 지휘자의 복장에 무척 화가 난 듯 불만을 토로했다. “무슨 지휘자가 넥타이도 매지 않았네. 격식 없는 바지를 입고 말이야. 그리고 저 신발은 구두도 아니잖아.” 그 지휘자는 다름 아닌 현재 베를린필의 지휘자로 있는 사이먼 래틀이었다. 그 평론가는 음악 자체로 평가하지 않고 주변적인 옷으로 음악을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평론가는 음악적이 아닌 걸로 음악을 평가하는 관객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음악성을 논외로 하고 패션만으로 지휘자를 평가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그의 논지를 동의하는 편이지만 내 생각은 약간 다르다. 음악은 종합예술이다. 사람들은 음악을 통해서 생각을 표현하듯 패션을 통해서도 무언가 말한다. 그 중년 부부는 패션을 통해서 무언가 말하고 싶었다. 나는 그 입장에 동의할 수 없지만 그 메시지마저 무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사이먼 래틀도 패션을 통해서 그 중년 부부에게 무언가 들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사이먼 래틀은 클래식이 일반 대중과 멀어지고 있는 현실을 바꾸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대중음악을 선곡하기도 하고, 클래식의 대중화를 위해서 젊은 층을 위한 다양한 공연을 기획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휘자는 일명 펭귄복라 불리는 턱시도를 유니폼처럼 입지만, 사이먼 래틀은 캐주얼한 옷을 자주 입는 편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파격적인 복장은 아니다. 파격적인 걸로 치면 바이올린 연주자인 나이겔 케네디는 드라큘라 복장을 하고 연주를 하기도 했다. 사이먼 래틀이 추구한 가치는 파격보다 편안하게 대중들이 즐길 수 있는 클래식 음악을 원했던 거다.

클래식 음악인들은 다른 음악인에 비교해 복장을 다소 보수적으로 입는 편이다. 음악의 장르마다 옷을 입는데 나름의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한다. 트로트는 반짝이 의상이 있고, 록은 가죽바지와 부츠가 있다. 힙합은 아예 힙합 패션이 있어서 헐렁한 바지와 티가 연상된다. 이런 경계를 넘으려는 노력도 있었다. 재즈 연주자인 윈튼 마샬리스는 클래식한 정장을 즐겨 입었다. 그는 재즈도 클래식처럼 근사한 공연으로 대접받기 위해서 답답한 정장도 마다하지 않았다.

음악인들 옷을 선택하는데 장르의 규칙을 무시할 수 없다. 옷도 일종의 음악의 수단이다. 음악적 색깔을 표현하는데 적합한 옷을 고를 수 있다. 상류층 관객의 취향으로 평가할 때 사이먼 래틀의 복장은 도전이다. 사이먼 래틀의 옷은 특정한 계급과 연령에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패션도 하나의 메시지로 음악에 녹아 들어가 있는 셈이다.

음악만 따로 놓고 평가하기를 바라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음악은 순수한 결정체가 아니라 공연장, 패션, 연주, 노래, 관객의 반응이 합쳐서 만들어지는 종합예술이다. 패션을 통하여 전달하는 메시지도 음악의 한 부분으로 즐길 때 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음악감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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