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가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일조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배우 차인표였다. 1994년 MBC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 차인표는 색소폰을 멋지게 연주하는 모습이 대중을 사로잡았다. 이후에 재즈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재즈를 듣는 대중의 저변이 확대되었다.
한국에 재즈가 들어온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20년대와 만난다. 당시 일본은 스윙 재즈의 열풍이 불고 있었고, 식민지였던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던보이’, ‘모던걸’로 대표되는 개화 지식인들 사이에서 ‘재즈’는 이미 유행이 되고 있었다. 1929년 별건곤이라는 잡지에서 이서구는 쟈스(jazz)라는 향락에 빠진 세태를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재즈는 음악뿐만 아니라 춤도 포함되는데, ‘재즈 기생’이라는 말도 있었다. 재즈 춤이나 노래를 전문으로 하는 기생도 있었던 모양이다.
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초반에 이런 재즈에 대한 문헌이 조금 남아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춤을 추었는지 알 길 없지만, 재즈의 열풍이 개화 지식인들 사이에 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축음기나 라디오를 가진 사람들에게 한정된 현상이지만.
1930년 콜럼비아 레코드의 신보 광고문에 ‘시대적 요구의 재즈로 등장, 복혜숙의 목장의 노래, 애(愛)의 광(光)’이라는 문구를 처음으로 볼 수 있다. 이 자료 때문에 복혜숙은 재즈의 선구자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하지만 당시 재즈라는 용어는 재즈 장르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게 일반적인 학설이다. 재즈는 한국에 들어온 서구음악의 통칭으로 보는게 타당하다. 재즈 송은 샹송, 라틴음악도 그 범주에 포함되는 폭넓은 용어였다. 서구문물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없었기에 이런 혼란은 자주 발생하였다.
복혜숙은 종로의 행진곡, 그대 그림자라는 일본 노래의 번안곡도 노래했고, 축배의 노래, 여자의 마음 등 오페라 노래도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복혜숙은 딱히 재즈 전문가수로 보기는 힘들다. 복혜숙은 가수보다 영화배우로 활동했다. 1935년 2월 김용환은 도성의 밤노래(일명 술취한 우유 배달부)라는 재즈를 노래했다고 포리도루 신보에서 밝히고 있다. 1935년 5월 오케 레코드 신보에서 ‘유행하는 재즈송’으로 삼우열이 집시의 달을 냈고, 기생 가수인 김연월이 푸른 하늘을 발표했다. 오케 레코드 전속 가수였던 이복본은 신민요인 노들강변을 재즈 스윙리듬으로 불러서 객석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서 아주 유명했다.
1930년대 재즈의 열풍을 지금의 관점으로 상상하기 어렵다. 할리우드 영화와 더불어 재즈의 인기는 서구사회에 관한 동경을 일으켰는지 서구를 낭만적 내용으로 다룬 노래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재즈는 서구화, 근대화를 상징하는 대중문화였으리라. 2000년대 재즈가 주는 이미지도 세련된 서구문화와 상류층의 취향이고, 이것은 1930년대에 느꼈던 재즈가 주는 인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