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시간에 ‘다양성’에 관해 토론했다. 문화 정책에서 항상 먼저 거론되는 항목이 다양성이지만, 그게 빛 좋은 게살구가 아닌가 하는 의견이 다수였다. 다양성이라는 명목으로 추진되는 정책들이 과연 얼마나 실효성을 가지는지 의문이 든다. 다양성을 보장하자는 의견에 반발할 사람은 없다. 다양성이 없는 획일한 사회를 누가 지향하려 들겠나? 하지만 이런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문화 정책이 추진되지 않는다.
다양성은 특정한 가치라기보다는 중립적인 의미로 포장된 소극적인 개념이다. 다양성을 표방하려면 구체적으로 다양성에 포함되어야 할 대상이 명시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외국인, 노동자, 노숙자, 동성애자, 여성, 장애인 등의 사회적 약자가 다양성에 당연히 적극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소수자의 가치를 살리고, 특권 계층이 모든 권익을 독점하지 못하게 막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각종 사회, 문화 정책에서 다양성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적극적인 제도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진정한 다양성을 추구할 의사가 없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문화정책의 다양성으로 눈을 돌려보자. 현 정부가 추진하는 스크린 쿼터제의 축소는 문화적 다양성을 보장해 주는 걸까? 스크린쿼터 제도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스크린 쿼터로 확보된 한국영화의 몫이 문화적 다양성 확보보다 소수의 돈이 되는 특정한 장르와 영화사에 국한된 현재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조폭 코미디, 학원물, 분단 영화에 한정된 장르적 편협성이나, 대자본의 연합이 만들어낸 과점형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는 상황은 문화적 다양성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문화적 다양성을 일궈내기 위해서는 독립영화들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목소리를 가진 영화들을 볼 기회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스크린쿼터의 축소는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을 살리기 위한 길과 정반대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이 50%가 넘으니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문화관광부의 논리는 단기적 현실로 장기적 상황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사고다. 세계영화시장의 80%를 점유하는 할리우드에 시장을 전면적으로 개방하면, 이제 커가기 시작한 한국영화의 싹을 자르는 행위이다. 문화산업의 덩치만 놓고 보자면, 미국영화와 한국영화는 코끼리와 개미의 차이다. 신자유주의 정부는 시장의 논리로 문화계의 체질을 개선하겠다고 나섰다.
FTA 협상의 제물 중의 하나로 영화시장을 개방하면서, 문화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예술전용관을 짓고 독립영화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스크린쿼터의 축소는 할리우드 영화계에 시장을 내어주고 말 것이다. 예술영화와 독립영화의 지원을 할 것이면, 스크린쿼터를 유지하는 정책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효과를 볼 수 있다.
스크린쿼터의 축소는 소수영화들의 기반을 더욱 위협할 것이다. 현재 소수영화의 지원책은 스크린쿼터 축소에 대한 반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 동원된 대비 수단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문화적 다양성을 위한다면, 스크린쿼터제를 원상으로 회복하고, 소수영화에 대한 스크린을 보장해야 한다. 영화뿐 아니라 다른 문화산업에도 비슷한 보호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독점 대자본은 자유시장 질서를 깨뜨릴 뿐이다. 시장은 결코 만능이 아니다. 다양성과 시장을 함께 고려할 수 있는 균형 찾기가 더욱 중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