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 기사는 죽은 사람에 대한 소식을 알리는 글이다. 한국 신문에서 다루는 부고 기사는 장례식장을 소개하고, 발인이 언제며, 죽은 사람의 삶에 대한 간단한 소개 글이 전부다. 가끔 유명한 사람이 죽었을 경우에는 긴 지면을 할애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도 그 사람에 대한 적절하고, 상세한 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뉴욕타임스는 부고 기사를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룬다. 한 지면을 다 할애해 자그만 자서전을 쓰듯이, 그 사람의 행적과 개인적인 평가도 폭넓게 보도한다.
한국 신문과 미국 신문의 차이는 무엇 때문인지 궁금해졌다. 미국 문화가 죽은 이에 대해서, 과거에 관해서, 더욱 소중히 한다는 건가? 한국은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 문화란 말인가? 그 원인을 쉽게 규명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근대화의 산물은 아닐는지. 박정희 정권을 비롯한 군사 독재 시절을 겪으며, 더 과거로 거슬러서 일본 식민지 수탈 속에서 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하는 가치관이 길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박정희는 ‘새마을 운동’이라는 구호로, 전통보다는 잘사는 미래의 나라로 국민들을 이끌었다.
우리의 과거는 그냥 헐벗고, 원시적인 지워버려야 하는 그런 못된 이미지로 포장하고, 몇억 불 수출탑을 목표로 삼고, 불도저식 고속도로도 만드는 진취적 이미지를 추구하게 했다. 이런 과정에서 과거는 돌아볼 가치도 없고, 돌아봐서는 안 되는 괴물이 되어갔다. 경제 발전을 이룩하는 동안 희생된 사람들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고, 번쩍이는 수출탑이 빛나게 되었다.
혹자는 우리나라가 기록에 관심이 없었던 민족으로 매도하는데,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사관들이 기록해서 여러 서고에 나눠서 보관한 문서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후세에 전한 선조들은 역사를 무시하지 않았다. 단지 그런 전통이 일본강점기, 군사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잠시 뒷전으로 밀려난 탓이다. 그리고 사자에 대한 의례는 상여 노래든지, 민요를 통해서 전해지듯이 중요한 우리의 문화였다. 한국문학 속에 죽음을 다룬 글들이 많은 것은 과거를 소중히 하는 문화라는 것을 방증한다. 한국은 과거를 돌보지 않고, 미래만 보던 나라가 아니라,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확인하는 문화였다.
서구식 근대화로 변화한 의식이 한국의 과거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우리의 전통은 열등한 것이고, 서구식 근대화는 뛰어나다는 잘못된 인식의 틀이 문제이다. 그런 인식의 틀은 사람들을 자꾸 한국 밖의 서구로 이민을 보내고, 과거를 부정하게 만든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산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종종 잊게도 만든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가지는 유산도 별로 중요하게 다루지 못하게 된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죽어서 사라지는 것들이 아니라 앞으로 만들어갈 미래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거와 대화가 단절된 사회에 진보가 있을 리가 없다. 과거에서 배우지 않고서, 어떻게 다가올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건가? 사라져 가는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없다면 암흑으로 빠질 수 있다. 나아가 전통문화 자체도 새로 고쳐서 배울 정신이 필요하다.
미국이 박물관, 기록보관소, 역사에 집착하는 것은 짧은 역사에서 비롯된 열등감일지도, 그 때문에 비약적인 성장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자그만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역사를 강조하는 호들갑이 어쩌면 지금의 미국을 만들었을 것이다. 다시 부고 기사를 빌어서 말하자면, 미국인을 다루는 부고 기사는 정확한 정보와 날카로운 인물평이 들어있는 반면에, 미국 밖의 인물, 데리다 같은 사람의 부고란은 자크 데리다를 단순히 난해한 인물로 깎아내리는 경향도 있다.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만심이 해외의 지식이나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한다.
한국은 국내 인물의 부고보다 유명한 해외의 지식인을 특집으로 다룬다. 우리나라의 지식인이 해외의 지식인에 비교해서 못하다는 말인가? 서구 중심의 근대화를 겪는 동안 철저하게 그 도식도 받아들이게 된 거다. 서구 중심 세계관이 부고 기사에서도 드러난 셈이다.
서구와 만나는 방식, 과거와 대화하는 절차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런 방식이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면, 앞으로 언제나 다른 것으로도 바꿀 수 있다. 그렇다고 과거의 방식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현재의 방식에 어떤 문제는 없는지 살펴보고 다시 다듬는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