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뒤떨어진 저작권법

저작권법이 마련된 이유는 예술의 창작자에게 자유롭고, 창의적인 활동을 도와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지금 한국에서 저작권법을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일은 역효과를 내고 있다. 법은 언제나 현실의 반영할 의무가 있는데, 현재의 저작권법은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

MP3라는 신기술을 이용한 음악향유의 문화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기존의 CD로만 만족하라고 소비자들에게 강요하는 꼴이다. 음반산업은 왜 MP3 플레이어 만드는 회사를 상대로 왜 소송하지 않는 걸까? 그건 아무래도 회사보다는 개인이 상대하기 더 쉬워서가 아닐까?

소비자도 엄연히 음반산업의 한 주체로 생각해야 한다. 소비자들이 없다면, 지금처럼 음반산업이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작권법도 이제는 소비자의 권리에 대한 항목을 추가해야 마땅하다. 그러기 위해서 소비자들의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

이미 소비자들이 기존의 기술에 만족하지 못하고 MP3를 폭넓게 사용하고 있다. 그 현실을 도외시하고, 기존 법적인 잣대로 소비자를 범법자로 만들려 한다. 음반산업의 위기를 신기술과 그를 받아들이는 소비자들에게 안일하게 돌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음반산업의 발전을 위해서, 지금처럼 처벌 위주의 방법은 시대착오적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기술의 발전을 막으면서 발전이 된 경우는 없었다. 음반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신기술을 껴안을 수 있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한다.

합리적 시장 속에서 MP3를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음악 예술의 공유가 무조건 시장에 해가 되는 건 아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음악을 들을 수 있었기에, 음반을 사서 들을 수 있고, 공연도 보러 갈 수 있다. 그런 정보를 완전히 통제하고 시장 안에서만 소비하라고 강요하는 건 마치 현대판 분서갱유가 아닐 수 없다.

예술의 사적인 향유만 허용되는 시대는 얼마나 끔찍한가? 음반을 듣기 위해서 다 사야 하고, 미술관이나 도서관은 그 기능을 상실하고, 개인의 서재나 개인의 미술관만 난무하게 될 것이다. 예술에도 빈부의 격차가 생겨서 부유한 사람들이나 즐기는 그런 폐쇄적인 문화만 양산될 것이다. 이런 폐쇄적인 환경에서는 창의적인 작품이 나오기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결국, 예술은 대중적 기반을 잃고, 부자들이 빈민들과 자신들을 구별 짓는 도구로만 인식될 것이다. 예술의 공적 영역을 지키면서,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균형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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