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천장을 깨뜨린 여성감독, 캐서린 비글로

캐서린 비글로 감독

아카데미 역사에서 최초로 여성이 최우수 감독상을 받았다. “허트 로커”의 캐서린 비글로는 전쟁 스릴러라는 다소 남성적 장르의 영화로 감독상과 함께 최우수 작품상도 타게 되는 영광을 누렸다. 1929년 1회부터 지금까지 할리우드의 영화의 권위를 상징하는 상으로 군림하는 아카데미상을 타는 일은 미국 영화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영예이다.

할리우드 여성감독 비율은 고작 7%

올해로 82회를 맞은 아카데미상의 긴 역사에서 여성 감독이 상을 타게 되는 일이 처음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최우수 감독상은 여태까지 ‘백인남자’에게만 허락된 상이었다. 다른 직업의 분야보다 비교적 자유롭다고 여겨지는 영화계도 보수적이긴 마찬가지다. 60~70년대에 거세게 일었던 여성해방의 움직임이 스크린까진 미치진 못했나 보다.

샌디에고 주립대학교 여성영화와 텔레비전 연구소의 마사 로젠 교수가 밝힌 자료를 보면, 할리우드의 여성 인력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 수 있다. 2009년에 개봉한 흥행 상위 250개 영화 중에 여성 감독이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7%밖에 되지 않는다. 로젠 교수는 미국사회에서 여성이 어느 정도 이상의 상위직위에 오르는 것을 어렵게 하는 ‘유리 천장’이 존재하듯이 할리우드 영화계에도 ‘셀룰로이드 천장’이 있다고 비유했다.

이는 단순히 감독직만의 문제는 아니다. 감독 외에도 시나리오 작가의 8%, 촬영감독의 2%, 편집자의 18%만이 여성이다. 영화관객의 절반은 여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남성이 대다수이다. 영화학교를 졸업하는 남녀의 비율은 거의 비슷한 반면 할리우드 진출에 성공하는 여성감독은 아주 드물다. 미국 영화감독협회에 등록된 여성감독의 수도 13%에 머물고 있다. 82년 오스카 역사 속에서 감독상 후보로 오른 여성감독은 한 손으로 다 꼽을 수 있다. 1976년 린다 버트뮐러, 1993년 제인 캠피온, 2003년 소피아 코폴라가 수상후보로 올랐고 올해 캐슬린 비글로가 네 번째로 후보로 선정되었다가 드디어 상을 받았다.

오래 못간 여성 감독 번영기

알리스 기 블라쉐 감독

영화 역사에서 여성감독은 비교적 일찍 등장했다. 프랑스인 알리스 기 블라쉐가 1896년 여자 감독 최초로 뤼미에르 형제와 조르주 멜리에스와 나란히 영화를 찍었다. 블라쉐는 1896년에 “양배추 요정”으로 데뷔해서 1907년까지 무려 400편의 프랑스 영화를 감독했고, 미국으로 건너가 354편의 영화를 더 찍었다. 블라쉐는 서부극, 전쟁, 역사, 로맨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작품을 제작했으며, 특히 단편영화 스타일을 확립한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작가주의 감독 루이스 웨버, 배우 출신 감독 월리스 라이드 등 다수의 여성감독은 무성영화시대에 남자감독과 대등하게 활동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한참 벌어지던 당시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초기 영화사에서 여성감독의 번영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1920년대 후반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성감독들의 적응이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변화의 시기에 살아남은 유일한 여성감독으로 도로시 아즈너가 있었다. 20년대 후반부터 40년대 초반까지 활동한 아즈너는 자신의 일을 갖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현대여성의 이야기를 영화로 주로 만들었다. 할리우드의 남성적,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도 꿋꿋하게 여성적 시각의 영화를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작품활동을 해나갔다.

아이다 루피노 감독

아즈너의 바통을 이어받은 아이다 루피노는 1950년대를 대표하는 유일한 여자감독이었다. 그녀는 논쟁이 될만한 사회문제를 피하지 않고 영화로 제작하였다. 루피노는 자신의 영화에서 싱글마더, 강간, 중혼 등 남자감독이 다루지 않았던 여성 문제를 직접 다루었다. 루피노는 자신의 영화에서 남자는 위험하고 믿을 수 없는 캐릭터로 표현했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이 처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영화는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당시에 인기있던 장르인 필름 누아르나 서부극을 만들거나, 텔레비전 시리즈를 연출해야만 했다. 영화의 주제가 너무 여성적 감수성에 빠져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루피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성적 주제는 여자만의 문제가 아니죠. 남자의 문제이기도 해요.”

아즈너와 루피노의 외로운 작업 속에서 성과도 있었지만, 할리우드에서 여성이 살아남을 수 있는 영역은 여전히 배우직 뿐이었다. 이런 가운데 성공적인 배우의 경력을 바탕으로 감독으로 거듭난 사람이 있었다. 60~70년대 최고의 배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다. 스트라이샌드는 1991년에 “사랑과 추억”이란 영화로 흥행도 하고 비평가들에게 작품성도 인정받았지만 오스카 수상후보로도 오르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고, 이를 두고 성차별이란 논란이 있었다.

“남자에게 열정과 책임감이 요구되는 사회이지만, 여자에겐 남자에 대한 감정만 허용된다”라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이에 대한 불만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올해 오스카 감독상 시상자로 나온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캐슬린 비글로의 감독상 수상을 마치 자신의 상처럼 기뻐한 것도 이러한 과거의 쓰라린 경험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달라진 영화시장, 달라지지 않은 영화 제작현장

낸시 마이어스 감독

독립영화나 다큐멘터리가 아닌 주류영화 감독의 영역에서도 여성의 힘이 커지고 있다. “줄리 & 줄리아”를 연출한 노라 에프런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대표적 여성감독이다. 에프런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유브 갓 메일” 등 로맨틱 코미디로 여성관객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섹스보다 대화가 중심이 된 영화로 로맨틱 코미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로맨틱 홀리데이” “사랑은 너무 복잡해”등의 작품으로 계속적인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낸시 마이어스도 노라 에프런에 뒤지지 않는 대표적인 여성감독이다.

마이어스는 “왓 위민 원트”에서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마초 배우인 멜 깁슨에게 여자옷을 입혀서 마초적 감성을 풍자했고,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에서는 금기시된 노년층의 연애마저 코믹하게 다뤘다. 특히, 코미디가 강조된 로맨틱 코미디로 흥행감독으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에프런이나 마이어스같은 여성 흥행감독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여성감독의 활약은 미미한 편이다. “포브스”지는 할리우드에서 여성감독이 드문 이유로 제작비가 높은 블록버스터 영화의 관객이 대부분 젊은 남자라는 사실을 들고 있다. 블록버스터 영화 마케팅이 주요 타겟으로 보는 관객층은 주로 14살에서 25살 사이의 남성이다. 성인 여성은 영화관에 오지 않는다는 믿음이 할리우드에 오랫동안 만연했다.

이런 관습도 여성 취향의 영화로 크게 흥행을 기대하지 않았던 “맘마미아”가 전세계적으로 6억 불 이상의 성적을 올리면서, 영화만 잘 만들면 여성 관객도 영화관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걸 할리우드 영화마케터들에게 보여주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트와일라잇”은 세계적으로 3억8천만 불이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고, 영화관에 잘 오지않던 10대 소녀팬까지 극장으로 불러모은 놀라운 영화였다. 여성취향의 영화들이 들인 제작비에 비하여 높은 수익을 올리게 되면서 여성감독의 수요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여성감독은 대체로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한정되어 있지만, 캐서린 비글로는 달랐다. 비글로 감독은 남성적 장르로 알려진 액션과 스릴러 영화를 주로 연출했으며, 그 장르 속에서 여성적 시각을 결합하는 것으로 경쟁하는 다른 남성감독들과 차별화했다. “폭풍 속으로”가 박스오피스에서 엄청난 흥행을 하면서 주류영화계에서 인정받았다. 비글로가 감독한 “허트 로커”는 폭발물 처리팀의 심리묘사를 섬세하게 다룬 수작으로 비평가들로부터 격찬을 받았고, 마침내 82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거머쥐며 오스카 감독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셀룰로이드 천장’

캐서린 비글로의 수상은 여성영화인의 위상을 드높여준 역사적 사건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녀의 수상만으로 현재 여성감독이나 다른 여성영화인의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섹스 앤 더 시티” “뉴문” “맘마미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 여성관객을 위한 영화들이 제작되는 현실이지만, 영화제작진의 성비 불균형은 쉽게 깨어지지 않을 전망이다.

할리우드는 군대를 연상케 할 정도로 남자 위주로 돌아가는 공간이다. “맘마미아”의 여성감독 필리다 로이드는 남성들 사이에서 영화를 제작하는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마치 남성 호르몬이 샘솟는 마초들의 해병대에 와있는 착각이 들어요.”

“트와일라잇”을 감독한 캐서린 하드윅은 여성차별적 분위기가 있다고 말한다. “영화계 사람들은 여성감독은 액션영화를 못 만든다는 얘기를 내 앞에서조차 수도 없이 했죠.” 하드윅은 “트와일라잇”을 성공적으로 연출했지만, “트와일라잇”의 속편인 “뉴문”의 연출은 남자감독에게 돌아갔다. 여성감독의 액션물을 믿지 못하는 제작사의 우려가 진하게 배어있는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82회 오스카 최우수 감독상을 탄 캐서린 비글로

2010년은 할리우드 영화인에게 최고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는 아카데미 감독상 부문에 여성감독이 최초로 수상한 해이다. 셀룰로이드 천장이 찢어지기 시작한 역사적 순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여성의 사회진출 시기를 고려한다면 한참 늦었지만, 이제라도 아카데미가 여성감독의 공로를 인정한 것은 의미 있는 발걸음이다.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In Category: 문화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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