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독일세대의 갈등이 드러난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나치의 유태인 학살 영화는 정말 지겨울 정도로 많이 봤다. 매년 스크린에서 죽어나간 유태인의 숫자만 해도 엄청나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끔찍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영화산업이 너무 오랫동안 우려먹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특히, 단순하게 선과 악의 구도로 학살을 반복해서 재조명하는 영화는 신물이 날 정도로 봤다. 그나마 최근에 본 에드리안 브로디가 주연한 “피아니스트”처럼 단순한 선악구도를 벗어난 나쁜 유태인, 착한 독일군이 섞여있는 영화가 현실적이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줘서 괜찮았다.

또 유태인 학살 영화인줄 알았는데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는 보다 복합적인 현실을 다룬 세련된 영화였다. 이 영화에는 유태인 학살 장면 하나도 나오지 않고, 전후 독일세대가 겪었을 윤리적 갈등이 담긴 법정 장면만 잔뜩 나온다. 이 영화는 나치나 유태인의 시각은 철저히 배제하고 ‘전후 독일인’의 시각에 충실한다. 마이클 버그의 삶 속에 스며든 나치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독일 사회가 겪었을 혼란이 영화 속에서 전면으로 부각된다. “책 읽어주는 남자”는 전후 독일인의 시각으로 유태인 학살을 다룬 최초의 영화가 아닐까.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유태인 문제를 다룬 전후 독일사회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너무나 거대하고 함부로 꺼낼 수도 없었던 부끄러운 독일의 과거가 재판으로 낱낱이 펼쳐진다.

15살의 마이클은 자신보다 나이가 두배 이상 많은 한나 슈미트를 만나서 사랑에 빠진다. 마이클의 첫경험은 한나에겐 과거를 잊으려는 허무적 쾌락이었다. 이 둘을 이어주는 건 섹스만이 아니다. 마이클은 한나에게 수많은 소설을 읽어준다. 한나는 마이클이 읽어주는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 환상에 빠진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빨리 끝나버린 한나와 마이클의 관계는 몇 년이 흐른 후 재판정에서 다시 재연된다. 한나가 나치 범죄의 가해자였던 것이다. 이런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된 법대생 마이클은 혼란에 빠진다. 마이클은 한나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이클이 한나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전후 독일세대가 부모 세대에게 느꼈던 관계를 연상시킨다. 전후 세대가 비록 스스로 저지른 죄는 아니지만 부모 세대가 한 악행 때문에 영향을 받고 괴로워한다. 그 과정은 지루할 정도로 오래 걸리고 상처도 제대로 아물지 않는다. 재판 같은 사회적 행위를 통해서 죄인을 처벌하는 방식으로 과거를 정리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 고통은 지속되고 있으며 비록 관련자가 모두 죽는다고 해도 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현재형이 될 것이다.

이 영화는 역사적 상처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복잡하다. 한나의 문맹이 그녀의 죄를 정당화시키지 못하고, 마이클의 한나에 대한 사랑이 한나의 죄를 사라지게 하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유태인이 나치를 용서하는 일은 더욱 일어나기 어렵다. 이런 역사적 부담 속에서 성장한 전후 독일세대는 어떤 심정일까. 이 영화가 출발하는 곳은 전후 독일세대가 겪은 윤리의식과 현실의 갈등이다.

한나와 마이클의 육체적 관계는 본능적 행위다. 사랑하는 남녀가 그 과거를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빠져드는 그런 관계다. 한나는 과거에 속한 사람이라면, 마이클의 현재를 사는 사람이다. 마지막 장면은 마이클이 딸에게 말을 건네는 건 미래와 대화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관계 속에서 사회는 성장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이클이 너무 답답해 보였다. 사회도 비슷하게 과거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과정은 마이클과 한나의 나이 차이 만큼이나 멀고 느리다. 한국 사회에서도 친일파, 군사정권 등이 저지른 용서못할 죄가 있다. 사회마다 집단의 죄를 용서하는 방식이 다르다. 절대적인 기준이란 없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감옥에 있는 한나를 위해서 책을 읽는 걸 테이프로 녹음하는 부분이다. 마이클과 한나는 테이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소통한다. 죄인과 사회가 소통하는 방식도 재판을 통해서 이뤄진다. 사회가 굴러가는 방식은 이렇게 간접적이고 복잡하다. 현실은 영화로 재구성되어서 관객과 만난다. 마이클이 녹음한 테이프는 영화적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다. 녹음된 테이프가 한나의 감방에서 재생되는 순간 문학이 다시 살아나듯이,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더 리더”는 나치의 범죄로 고통받는 후손의 현실을 보여준다. 역사는 흘러가지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In Category: 문화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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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민혁 2009년 5월 9일, 12:27 am

    같은 영화를 보고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건 이렇게 차이가 있네요. 생각의 깊이, 곧 관객이 지닌 인식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차이가 아닌가싶습니다. 이 영화에서 ‘독일 전후세대의 갈등’ 을 읽어내는 류동협님의 시각에 경의를 표합니다.

    잘 봤습니다. 예전에 살짝 엇박자를 낸 인연으로 ‘영화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수준에서 본 이 영화에 대한 인상 하나 링크하고 갑니다.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http://blog.mintong.org/556

    • 류동협 2009년 5월 9일, 10:06 am

      다른 시각이 있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재미가 몇 배로 늘어나죠. 그래서 영화를 보고나면 다른 블로그들은 어떻게 봤는지 늘 궁금합니다. 보내주신 링크의 글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개인의 깨우침이나 사회의 깨우침이나 비슷하게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 Reg Teddy 2009년 5월 9일, 1:16 am

    감상 잘 봤습니다…

    같이 본 애들은 마이클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더라고요… 결국 마이클이 한나를 자살에 이르게 했다고 그러던데…^^

    뭐 저는 그의 복잡한 심경을 읽었습니다. 사랑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죄…

    ‘전후세대의 갈등’ 이라고 표현하는게 참 공감이 가네요

    • 류동협 2009년 5월 9일, 10:11 am

      저도 마이클의 태도를 한동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한나의 자살과 연관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죠. 그보다 한나의 개인적 번민이 더 크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그 복잡한 심경이 집단으로 확장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notenore 2009년 5월 9일, 5:45 am

    “줄무늬 피자마를 입은 소년”란 영화도 유태인 확살영화에 또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거같네요.. 포스팅 내용 잘봤습니다..

    • 류동협 2009년 5월 9일, 10:12 am

      추천해주신 영화는 아직 못 봤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armarius 2009년 5월 9일, 10:30 pm

    2차대전에 관한 영화들은 본지가 오래됐고, 최근에 읽은 소설중에 괜찮았던 것은, Suite Francaise, 프랑스 조곡이었습니다.
    작가의 반 유대인 전력이 계속 논쟁중에 있기는 합니다만.

    • 류동협 2009년 5월 10일, 12:39 am

      그 소설은 서점에 가서 몇 번 집었다가 놓은 기억이 있어요. 재미있다고 하니 한번 읽어 보고 싶네요.

  • 줄리 2009년 5월 16일, 9:52 am

    한동안 볼까말까 망설였는데, 이글을 읽고보니 꼭 봐야겠내요. 늘 그렇듯 한쪽으로 쏠릴 수 있는 부분들을 적절히 누그러뜨리며 작품의 진정성, 읽는이의 진정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고리를 만들어 주는 글에 저 역시 경의와 강추를 보내요. 누군가의 얘기를 들을 때는 책보다 영화는 좀 더 두사람의 사랑에 초점을 두었다하여 한동안 보고 싶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들어와보니 여전한 류동협님의 글에 또 한번 생각의 깊이를 발견하고 떠납니다.
    6월 마지막 주 한국에서 만나요. 그 때 까지 열심히, 어려워도 잘 살아봅시다.
    잘 지내죠?

    • 류동협 2009년 5월 16일, 4:36 pm

      그 사랑도 세대간의 대화와 화해의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저렇게 질기고도 끈임없는 사랑이야말로 상처의 치유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한번 보시기를 슬며시 권해봅니다.

  • 박나영 2009년 7월 1일, 4:27 pm

    와..
    감상평 너무 잘 봤습니다.댓글 잘 남기는 나쁜 블로거인데..ㅋㅋㅋ
    어번엔 댓글 안 남길 수가 없네용~
    저두 이 영화 너무 감명 깊게 봤었어요…
    그리고 어제”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보고는..

    히틀러와 유태인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서 왔다가..
    오게 되었네요…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과 해설에
    박수를 보냅니당~~~^-^*

    • 류동협 2009년 7월 2일, 5:35 pm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이란 영화를 권해주시는 분이 많네요. 저도 그 영화를 한번 찾아서 보고 평을 또 써봐야겠습니다. 박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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