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진보 혹은 좌파가 가지는 의미

김규항이 쓴 “진보란 무엇인가?“는 조금 길지만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는 글이다. 선생의 진보에 관한 고민이나 역사적 성찰이 자세히 담겨있다.

내가 매일같이 읽는 논문이 죄다 막시즘, 비판연구에 관한 글이다보니 “좌파”나 “진보”에 대한 생각은 자주 하게 된다. 하지만 논문 속에서 주로 다루는 사회현실이 유럽이나 미국이라서 한국에 그대로 적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유럽처럼 계급갈등이 전면으로 부각되어 사회변화를 이끌어낸 경험을 한국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우리에게도 계급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전쟁, 군사파시즘, 반공주의, 개혁적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계급운동이 뿌리내릴 수 있는 기반이 부족했다.

한국사회에서 “좌파”가 차지하는 자리는 서구의 좌파에 비해서 상당히 오른쪽으로 물러나 있다. 대다수의 한국 사람에게 노무현, 김대중은 좌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들을 온건한 우파라고 주장한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좌파”의 개념도 보수적이다. 우파의 눈에는 개혁주의자들도 빨갱이로 보이는 게 한국 사회 이념의 지도다.

역사적으로 좌파/우파를 나누는 관습은 프랑스혁명때부터 시작되었다. 프랑스혁명 기간 동안에 의회에서 피지배 계급, 즉 노동자를 지원했던 사람들이 주로 왼쪽에 앉았다. 그리고 지배계급을 대변했던 사람들은 오른쪽에 앉게 되었다. 이렇게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좌파와 우파로 각각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는면서 좌파는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주의, 인권,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등 사회운동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성장하였다.

어떻게 한국에서 좌파를 대표하는 세력이 노무현, 김대중 같은 개혁주의자들 되었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보수가 바라본 좌파의 개념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우파가 지배계급으로 군림하면서 좌파에 대한 정의도 그 수준으로 막아놓았다. 좌파에겐 스스로를 정의할 힘이 없었다. 아무리 좌파가 좌파란 무엇이라고 주장하고 다녀도 대중들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보수적 좌파 개념을 퍼트리는데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보수 언론도 단단히 한 몫을 했다.

이상한 좌파 개념이 한국에서 등장한 이유로 좌파를 학살하고 탄압한 우파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다. 하지만 스스로 좌파세력의 대표자로 자처하고 나선 노무현, 김대중 같은 개혁주의자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노무현은 신자유주의 좌파라는 말도 안되는 신조어를 만들어 더 혼란스럽게 했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은 결코 좌파가 될 수 없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노동시장 유연화, 즉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도록 해서 기업가, 자본가를 배불리는 경제체계이다. 대다수 피지배계급 노동자들은 자유무역시장이 늘어 날수록 다른 나라의 자본가에게도 착취 당하게 생겼다.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의 이익을 보호하지 않고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신자유주의를 철석같이 믿는 김대중과 노무현은 좌파가 될 수 없다. 지금은 이명박 대통령이 수많은 실책으로 전국민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상황이지만 한국에 신자유주의를 들여온 지도자는 바로 김대중이었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은 모두 기득권 이익에 충실한 지도자지만 대중들의 눈에는 앞에 두명은 좌파고 이명박은 우파다. 좌파 입장에서 볼 때 세명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지배계급의 이익에 충실한 우파다.

이명박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좌파에게 더 미운 존재는 김대중, 노무현 같은 개혁주의자다. 사이비 좌파를 자처하며 집권했지만 좌파정책은 거의 실천하지도 않았다. 이들 정부가 국민의 미움을 받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무능한 좌파정부라고 몰아세웠다. 좌파는 집권도 해보지 못했는데 너무 억울하다. 이제라도 개혁주의자가 우파의 정체성을 제대로 밝혔으면 좋겠다.

만일 이명박 정부가 실책으로 다음번에 다른 정부로 바뀐다고 해도 좌파가 집권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노동자 계급의식도 희박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기에는 한국이 약육강식의 경쟁사회로 너무나 진행되어 있다. 온건한 좌파에 속하는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은 미약해서 제대로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강력한 우파의 오랜 집권의 영향이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이명박의 신조어는 얼마나 사이비 좌파의 집권에 대한 표현이다.

기형적인 좌파들에게 얼마나 더 속아줘야 하는가. 보수가 정의한 좌파에서 한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런 현실을 인정하기 위해서 사이비 좌파들을 역사에서 몰아내야 한다. 비판적 지지라는 도구로 좌파의 싹조차 자르는 그들이다. 좌파 개념을 바로잡는 것은 작은 일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이를 위해서 교육이나 언론이 맡아야 할 역할을 무척 크다.

좌파는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마음을 좀더 넓게 가지면 자신의 속한 계급의 이익을 벗어나 다른 약자와 연대하는 것이다. 소수에게 집중된 행복을 함께 나눠갖자는 게 그토록 잘못된 생각이란 말인가? 김규항의 글에서 시작한 생각의 꼬리가 조금 길어졌다. 좌파, 진보의 개념을 달리 쓰는 한국 사회의 보수성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우파의 논리 속의 좌파가 조금더 왼쪽으로 이동시키기 위해서 해야 할이 많음을 깨닫는다.

In Category: 사회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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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uerre 2008년 10월 21일, 5:58 pm

    노무현, 김대중이 온건하다는 것도 신화..

  • thetree 2008년 10월 21일, 11:11 pm

    본인은 무엇을 하고있는지요

  • 류동협 2008년 10월 22일, 3:54 am

    guerre — 분명히 온건하다고 볼 수 없죠. 다만 현정부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정의내리다 보니 그렇게 된 것 일 뿐이죠. 이것도 깨져야 할 신화라면 좀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거 같습니다.

    thetree —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블로깅”하지요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2008년 10월 22일, 6:42 am

    글쎄요.. 전 좌파도 아니고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도 아니라서 애매모호한 위치지만, “이명박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좌파에게 더 미운 존재는 김대중, 노무현 같은 개혁주의자”기 때문에 지금 정권같은 정권이 더 쉽게 들어섰다는 생각도 듭니다.

  • syd K. 2008년 10월 22일, 7:05 am

    Prosem 들을때 정말 난감한 수업이 “Class”를 가지고 한 수업이었는데… 그 수업시간에 제가 했던 말이, 저 위에 북한이 있는 상황에서, “계급 class”란 말은 함부로 못나오는 말이었다는 거였죠. (일단 저는 철저한 반공교육 세대이니 계급투쟁, 노동해방, 뭐 이런말은 자동적으로 공산주의-빨갱이, 라는 쪽으로 연상이 되는 측면도 있었으니까요 –;) 덕분에 한국에서는 계급대신에 계층이라는 말이 주로 나왔다는거…. 더군다나 일제시대, 625 겪으면서 우리나라처럼 “우리가 남이가”라는 사상으로 똘똘뭉친 상황에서 계급투쟁이 어디 가당키나 한겁니까 –;;; (사실 저런 극단적 민족주의도 일종의 manipulation이지만 그건 길어지니 차치하고. ) 어찌됐든 아직까지 북한이 위에 저렇게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에서 “진정한” 좌파는 못 나오걸요. 일단 남한이라는 국가적 아이덴티티의 상당부분은 북조선과의 비교 속에서 형성되는 면이 없지 않으니.

    그런데 요즘 드는 생각은 왜 꼭 서양식의 좌파-우파 모델을, 노선을 따라가야 하는거냐, 라는 거거든요. 역사적/정치적 배경이 다른데 걔네들 모델을 갖다놓고 우파좌파 이런식으로 재는건 좀 덜 타당한 것 같아서… 서구식 식민주의 모델을 일본제국주의에 갖다 적용할 수 없는 것처럼, 좌파-우파도 그런 개념 같아서 말입니다 (긁적) 저는 기본적으로 좌파-우파라는 모델은 상대적으로 구축되는 면이 없지않다고 보기 땜에,아시아적 좌파-우파 모델을 새로 만들어 보면 안되는 걸까 싶어서 말이죠–;; (예를들어 신자유주의를 들고오는 건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치고, 중요한 건 그 신자유주의에 어떻게 대항하는가, 가 아닐는지. 중국정부도 열심히 신자유주의 이용해먹고 있는데 그렇다고 걔들이 우파예요? 아니잖아요 –;; ) 전에 J모 선생 왈, Cultural Studies가 받아들여지는 것도 유럽이랑 미국이랑 그 모델이 다를수밖에 없다고 하던데, 이것도 그렇게 보면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 syd K. 2008년 10월 22일, 7:38 am

    thetree// 구라로 웹주소 넣으신 분한테 주인장님이 그런 코멘트 들을 이유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실말이 있으시면 제대로 된 웹주소 넣으시고 하세요.
    (주인장님 죄송함다… 제가 그냥 빠직 해서 –; )

  • Adrian Monk 2008년 10월 22일, 10:06 am

    87년 이후 좌파라는 형식적 개념을 제외한 모든 정치적 자유가 박멸된(sterilized) 현 시국에서 사실 좌우를 논하는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한국엔 좌파가 없습니다.

  • guerre 2008년 10월 22일, 11:21 am

    귄/ 한국에서 이명박 같은 정권이 등장한 것은 사람들이 개혁 우파를 지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계급적 지위와 반대로 투표하는 특수한 경향 때문입니다. 또 제가 장담하건데 이번 정부가 이명박이 아니라 정동영이었더라도 여전히 한국 민중들은 경제적으로 고통 받고 거리에서는 쥐어 터지고 있었을 겁니다. 현재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는 이제 1년도 안 된 MB 정부에서 모두 망쳐 놓을 만큼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계속 누적되어 왔던 것이고 언제나 처럼 위기에서 터진 것일 뿐입니다. 게다가 한국에서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체제를 공고화시킨 것은 (좌파라고 자처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공이 컸다는 것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좌파 신자유주의 정부라… 개가 웃을 일이지요.

    syd.K/ 현재의 자본가/노동자라는 계급 분화는 자본주의 사회를 통해 형성된 것이므로 이미 자본주의 사회의 첨병을 달리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자본가/노동자 계급을 각각의 기반으로 하는 정치 세력인 좌/우 혹은 진보/보수의 개념이 통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한국은 이미 국내적 특수성을 넘어선 전세계적 경제 체제 안에, 그것도 아주 자발적으로 잘 편입돼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하신 Cultural Studies의 태두들은 대개 좌파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아 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신들을 marxist가 아니라고 말한 사람들은 있지만 그 사람들도 자신들이 좌파 혹은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얘기한 적은 없습니다.

    adrian monk/ 무슨 의미로 한국에서 좌파가 없다고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힘 있는 정치적 단위로서의 좌파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윗글에서의 논하는 개념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좌파를 자처하는 많은 진보 지식인들이 병맛의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지 좌파 자체가 완전히 박멸되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용감한 주장의 근거를 좀 듣고 싶습니다. 병맛 지식인들이 많다는 건 87년 이후 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얘기입니다.

  • guerre 2008년 10월 22일, 11:40 am

    동협/ 남의 블로그에서 헛질해서 미안!!

  • 류동협 2008년 10월 23일, 1:45 am

    제가 하고 싶은 얘기보다 더 많은 걸 guerre님이 다 해주셔서 달리 보탤 말이 없네요. 다만 한가지만 덧붙이고 싶은 얘기는 좌파/우파의 개념은 한국사회를 분석하는데 여전히 유용한 개념이고 앞으로 더 많은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좌파의 입지에 불리하게 작용한 면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계급사회이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서구적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현실에서 좌파만 따로 떼어내서 파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guerre — 한 수 잘 배운걸요. 언제든지 헛질을 많이 부려주세요. 이래서 블로그하는 맛이 나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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