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닮은 배트맨과 조커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2008)

dark knight

범죄를 소탕하기 위한 배트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담시는 점점 위험해진다. 악당들 조차도 두려워 하는 조커(히스 레져)의 등장으로 고담시는 위기에 빠진다. 고담시민은 배트맨 때문에 오히려 도시가 위험해졌다며 배트맨을 비난하게 된다. 도시의 안전을 위해 몸소 뛴 영웅의 위신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배트맨(크리스찬 베일)은 매스미디어의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지만, 한편으로 계속되는 부상에 지치고 정체를 감추느라 바쁘다.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조차 대놓고 사랑할 수 없다. 배트맨은 외롭다. 슈퍼맨, 스파이더맨, 핸콕 등 슈퍼히어로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가 바로 외로운 영웅의 모습이다. 배트맨의 적수 조커의 등장으로 배트맨은 더이상 외롭지 않다.

불확실성의 공포로 다가온 조커

조커는 불확실한 존재이다. 그 불확실성이 더 큰 공포를 자아낸다. 영화 속에서 조커의 정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의 이름, 고향, 직업, 부모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얼굴도 광대 분장 속에 감춰져 있다. 그의 정체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면 조커가 만든 공포는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다크나이트”에서 조커는 자신의 입가에 생긴 깊은 상처에 대한 설명을 두 차례 들려준다. 어떤 이야기가 진실인지 알 수 없다. 상대에게 최대한 공포감을 주기 위해 그때마다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믿음직하다. 조커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며 사기의 귀재이다.

슈퍼히어로 배트맨조차 조커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다. 조커가 배트맨에게 인질을 숨긴 장소를 알려주지만 그 곳에는 기대했던 사람은 없었다. 강직한 검사 하비 덴트(아론 에크하트)도 조커의 이야기를 믿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 최신형 무기와 장비를 갖춘 배트맨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조커가 무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의 비상한 두뇌 때문이다.

조커는 범죄자들에게도 두려운 존재다. 도입부 은행을 터는 범죄자들끼리 서로 죽이는 장면은 조커가 계획했다. 범죄자의 심리를 교묘하게 역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돈을 모두 가지지만 그걸 모두 불태운다. 돈도 조커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목적이라고는 배트맨과 같이 한바탕 노는 게 전부다.

이 광기에 찬 괴물, 조커를 상대해야 하는 배트맨이 불쌍하다. 불확실하고 무질서한 고담시 창조에 앞장선 조커와 범죄를 막고 질서를 복원하려는 배트맨의 대결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조커가 혼란을 일으키면 배트맨에 뒤따라와서 그걸 바로잡고 문제를 해결한다.

모두가 선이며 악이다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조커는 악이고 배트맨은 선이다. 그 중간에 하비 덴트 검사가 있다. 원래 하비 덴트는 배트맨이 하던 일을 합법적으로 실천하려는 이상주의자였다. 다크 나이트 배트맨은 공권력을 넘어서 자기 방식대로 범죄자를 소탕하지만 화이트 나이트 하비 덴트는 법으로 범죄자를 잡아 가두었다. 하지만 하비 덴트는 개인적 불행에 대한 분노에 이성을 잃어 악당 투페이스가 된다.

선과 악의 대결은 복잡한 이중적 인간의 출현으로 의미를 잃어버린다. 하비 덴트는 악의 처단자에서 악의 화신로 변화했다. 배트맨 조차 이성을 잃고 취조실에서 조커를 마구 때린다. 그리고 선택의 상황에서 배트맨은 대의보다 개인적 사랑을 선택했다. 고상한 영웅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분노에 떨고 있는 악당같은 배트맨의 모습은 이 영화의 압권이 되는 장면이다.

조커는 다른 방식으로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선량한 시민이 탄 여객선과 죄수가 탄 여객선에 서로를 파괴할 권리를 줬다. 누가 먼저 폭탄 기폭제 버튼을 누를지 긴박한 상황이다. 시민이라는 선이 죄수라는 악을 어쩔 수 없이 처단한다고 해도 그 순간 선은 사라지고 만다.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사악한 이기적 악당만 남는다.

조커에게 인간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악을 꺼내기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배트맨은 그 반대로 선을 믿고 악을 처단하기만 한다면 고담시는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배트맨의 신념을 믿고 싶지만 조커의 광기가 더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이성이 발전했다는 현대 사회에도 살인, 강도, 절도가 일어난다. 얼마전 그루지야에서 전쟁이 터져서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다.

악을 대하는 미국의 태도

미국 시카고에서 촬영한 “다크 나이트”의 고담시는 미국을 연상시킨다. 마찬가지로 조커는 미국의 법질서를 파괴하는 테러리스트와 닮았다. 영화 “다크 나이트”는 테러리스트를 대하는 미국의 태도를 다룬다. 바로 배트맨이 조커를 잡기 위해 고담시민의 휴대폰을 감청하는 부분이다. 부시 행정부가 테러리스트 감시를 위해서 미국 시민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한 행위들에 대한 성찰을 담은 것이다. 비록 테러리스트를 처단하기 위한 목적이지만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를 정당화할 수 없다.

휴대폰 감청을 명령하는 배트맨에 대해 기술담당자 폭스(모건 프리만)는 심각한 우려를 표현한다. 배트맨에게서 막강한 권력을 지닌 조지 부시 대통령의 모습을 읽게 되어 께름칙하다. 한 개인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면 그런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배트맨은 슈퍼히어로이면서 거대 기업의 회장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최대의 권력을 누리는 권력자이기도 하다. 절대 권력자가 올바른 판단으로 잘 해준다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엄청난 파국이 일어날 것이다. 권력에 대한 견제가 없는 상황은 파시즘 같은 심각한 독재로 나아갈 수 있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은 슈퍼히어로다. 국제사회 문제를 중재하는 유엔이라는 국제기구의 판단보다 미국의 결정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진다. 초강대국 미국은 마치 배트맨처럼 경찰보다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한다. 경찰조차 법적으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배트맨의 힘에 기대어 해결한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전세계적 뉴스가 되는 현상은 그만큼 차기 미국 대통령의 가공할만한 전세계적 영향력을 실감하게 한다. 테러리스트를 처단하기 위해서 모든 시민을 감시하는 부시의 미국과 배트맨은 이 영화가 던져준 중요한 화두다.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가 그 힘을 책임있게 쓰기만 한다면 괜찮은가? 시민들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기술과 힘에 대한 사회윤리적 성찰이 필요하다.

국제적 테러리스트 처단이라는 명분으로 미국은 아프카니스탄,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그 와중에 일부 테러리스트와 무관한 대다수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범죄자 근절에 적극 나선 배트맨의 노력으로 무고한 고담시민들이 위험해졌다. 범죄와 악을 대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이렇게 마구 밀어부치다가 전세계가 전쟁터가 될 형국이다. 이성을 잃어버린 영웅은 악당보다 더 두려운 존재가 된다.

“다크나이트”의 조커와 배트맨은 동전의 양면이다. 둘다 세계를 파괴할 만큼 힘을 가졌지만 다른 선택을 한 초인이다. 어둠의 기사 배트맨은 조커를 맞아 힘겨운 싸움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강력한 힘에도 맞서 싸워야 하는 이중의 대결을 펼쳐야 했다. 배트맨이 절대적 힘에 비례하는 책임을 갖추지 못했다면, 조커의 계획대로 고담시는 혼돈의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In Category: 문화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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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uerre 2008년 8월 19일, 6:12 pm

    문제는 배트맨이 자신의 선을 실천하려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악이 행해진다는 것.. 이 영화 전체는 바로 선을 믿고 실천하는 배트맨의 행위 자체가 온당하냐는 거대한 질문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보면 조커는 악이라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자.. 물론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굉장히 악하긴 하지만.. ㅎ

  • 프랭키 2008년 8월 20일, 12:42 am

    대단한 영화더군요. 워낙 이 시리즈를 좋아했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이 이정도까지 해낼 줄은 몰랐습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아이맥스관에서 다시 한번더 보고싶더군요. 다시 보면서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찬찬히 정리하고 싶어졌어요. 다크나이트는 미국이 ‘악’이라고 규정한 것들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말이 인상 깊네요.

  • 푸코 2008년 8월 23일, 3:37 am

    이제까지 본 평론 가운데 가장 인상깊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영화로부터 더 많은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평론의 목적이라면, 그 존재이유에 정확히 걸맞은 글이 아닐까 싶네요.

  • 류동협 2008년 8월 23일, 12:15 pm

    guerre — 선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에 대한 성찰을 하게 해주는 영화죠. 그리고 조커가 던지는 의미심장한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죠.

    프랭키 — 미국이 규정한 “악”의 기준 자체가 모호하고 부당하죠. 자의적인 잣대가 자칫 선한 사람들까지 괴롭힐 줄은 몰랐겠죠.

    푸코 — 쑥스럽습니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평론을 쓰도록 매진하겠습니다. 🙂

  • darkness 2012년 6월 23일, 12:18 am

    조커는 왜 이렇게 미쳤을까… 를 생각하면서 영화를 봤습니다.
    그 눈빛을 보셨나요?
    광기에 물든 살인마의 눈빛이면서도 고독함에 몸서리치는 외로운 눈빛..
    어쩌면 조커는 우리 모두의 무관심이 만들어낸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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