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판타지 사이: 태왕사신기 (2007)

내가 태왕사신기를 보고 처음 관심을 가졌던 건 단순한 사극의 틀을 벗어난 판타지적 이야기 전개 때문이다. 단군과 사신 신화와 화천회라는 무협장르적 요소가 자연스럽게 섞이고 있음에 주목했다. 김종학 PD는 판타지 장르답게 컴퓨터 그래픽으로 신화시대를 멋지게 그렸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에 길들여진 관객의 눈을 맞추기는 무리였다.

우리도 드라마로 이런 근사한 컴퓨터 그래픽을 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나는 이런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을 바탕으로 태왕사신기가 계속해서 판타지로 전개되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나의 기대와는 반대로 다시 역사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사료를 바탕으로 한 본격역사극은 전혀 아니었다. 광개토태왕의 역사적 업적이나 정복기에 관한 내용은 마지막에 나레이션과 자막으로 아주 간단하게 처리된다.

다시 사신의 신물을 찾고 그 신물이 깨어나는 이야기는 판타지적 요소이지만 너무 늦게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회에서 신물을 없애버리고 인간의 길에 대해 태왕이 독백한다. 태왕사신기가 판타지를 지향했다면 사신과 신물의 등장을 중심으로 다뤘어야 한다. 신물이 깨어나는 장면도 비중있게 처리했어야 하는데, 백호의 신물은 언제 깨어나는지도 모르게 그리고 있다. 그나마 중요하게 다룬 건 현무의 신물정도라고 할까.

탄생부터 신화적, 판타지적 인물인 광개토태왕에게 역사적 면모를 기대하는 순간 이 드라마는 균형을 잃게 된다. 호개의 일당이 왕권에 도전하는 부분에서는 기존 사극의 틀을 따르지만, 화천회가 개입되고 쥬신의 별을 타고난 운명은 전형적인 판타지다. 그 둘 사이에 조화가 잘 되었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역사와 판타지는 잘 섞이지 않았고 드라마는 길을 잃었다.

역사와 판타지 사이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은 마지막 회에서도 시도되었다. 후연과 화천회 연합군에 맞서는 전쟁장면과 대장로와 흑주작이 된 기하와 대결하는 장면이 겹쳐진다. 설득력없이 역사와 판타지를 섞으려는 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신물을 모두 부수고 흑주작이 된 기하에게 걸어간 담덕으로 이 드라마는 결말을 맺고 있다. 하늘의 운명을 거부하고 인간의 길을 가겠다는 의미인가? 지난 23회 동안에 했던 하늘에 대한 이야기는 다 뭐란 말인가? 뜬금없이 인간의 고뇌를 털어놓고 불길 속으로 걸어간 담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다. 하늘의 뜻이라고 믿고 정복전쟁을 했던 광개토태왕이 허무를 깨닫는 순간이다. 역사로 해결할 수 없는 이야기는 다시 판타지로 회귀하는 거다.

사전 제작방식으로 드라마를 제작하겠다던 태왕사신기팀은 결국 기존의 드라마처럼 생방송 체제로 돌아갔다. 오히려 방송시간도 맞추지 못해 뉴스데스크 시간까지 늘이는 파행까지 보여줬다. 그런 상황 때문이었을까 초반에 잘 짜여졌던 이야기 구성이 엉망이 되고 결말도 제대로 맺지 못했다. 역사극과 판타지을 넘나드는 퓨전사극의 꿈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시작은 방대했으나 끝은 아름답지 못했다.

In Category: 문화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Show 0 Comments
No comments yet. Be the first.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