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손목시계

내가 외출할 때 항상 챙기는 물건은 지갑, 열쇠, 휴대전화 그리고 손목시계다. 며칠 전에 손목시계의 건전지가 수명이 다 지나서 멈췄다. 습관은 무섭다. 아무 생각 없이 멈춘 시계를 차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 손목을 연방 들었다가 놓았다. 정지된 시간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계가 없더라도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건전지를 바꾸러 가는 일도 자꾸 미루게 된다.

근대적 산물이라는 시계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전의 시간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옛날옛적에 한 사내는 해가 중천에 뜰 때 장터에서 옆 마을 처자와 만나기로 했다. 그는 시계가 아닌 하늘만 올려다봤을 것이다. 비라도 쏟아지면 낭패다. 시간을 종잡을 수 없으니까. 일찌감치 약속장소에 나가서 비를 맞는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시간을 잘게 나누지 않았으니 어느 한 쪽이 기다리는 일은 예사였을 것이다. 서로가 생각하는 시간은 다르더라도 누구를 탓한 시간의 기준조차 없었으니까.

시계 없이 사는 삶은 어땠을까? 끔찍할 정도로 느리고 기다림이 길었으리라. 초 단위의 시간이 아니라 해가 떠서 지는 시간을 대충 서너 단계로 나누는 일이 보통이었을 것이다. 시계가 발명되어 보급되면서 분이나 초 단위로 정리된 시간에 맞춰 살다 보니 인생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삶이 되었지만, 해가 뜨고 지는 자연의 흐름을 벗어난 인간이 만든 기계적인 시간이 탄생한 것이다.

사람이 몸에 부착하고 다니는 유일한 기계는 손목시계가 아닐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인간과 한몸이 된 기계다. 시계는 이미 몸 일부가 되었다. 출근 시간에 늦지 않게 회사에 도착하려면 현재 시간을 확인해야 한다. 친구와 약속시간에 맞춰서 도착하려면 시계는 필수품이다. 기차시간, 비행기 이륙시간, 도넛이 나오는 시간에 맞춰서 몸이 움직인다. 얼마 전 미국은 일광절약시간이 끝나서 일제히 시간을 바꿔야 했다. 제 때에 바꾸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다른 시간대를 한동안 살아야 한다. 시계를 몸에 이식하지 않을 뿐이지 시간에 몸을 맞춰가지 않으면 살기 어려워진다.

집 안에 있는 시계를 가만히 세어보니 여섯 개나 된다. 라디오나 전기밥솥 등 가전기구에 붙어있는 것까지 더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 시계에 중독된 환경이다. 당신도 주변에 있는 시계를 헤아려 보면 무슨 소리인지 알 것이다. 집 바깥을 나가더라도 시계는 끝까지 쫓아온다. 지하철역, 식당, 회사, 영화관을 가더라도 시계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한다. 동전 세탁소에서 시간에 맞춰 빨래를 찾아가지 않으면 누군가 화를 내며 내 빨래를 꺼내놓을 수도 있다. 시간에 맞춰 살지 못한다면 무례하거나 무능한 사람이 된다.

내 손목에 멈춘 시계는 시간을 정지시킬 수 없다. 손목시계보다 더 강한 놈이 있다. 휴대전화가 그 역할을 도맡아서 성실히 해낸다. 바뀐 일광절약시간도 자동으로 맞추는 놀라운 능력까지 뽐낸다. 스마트폰은 세계시각도 친절하게 알려주고 빨래가 끝나는 시간도 정확히 알려주는 알람기능도 있다. 시간 약속에 늦지 않게 미리 알려주기도 한다. 내가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시계가 먼저 알려주는 세상이다.

주말에는 손목시계에 약을 넣으러 시계방에 가봐야겠다. 휴대전화의 시간보다는 느슨했던 그 시간을 되찾아와야겠다. 그 동안 꽉 조인 시계줄이 답답했었는데 순간 포근한 포옹처럼 느껴진다.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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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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