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와 연애하기

루비 스팍스(Ruby Sparks, 2012)

작가가 자신이 만든 캐릭터와 사랑에 빠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작가가 원하는 대로 외모도 성격도 만들 수 있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최고의 관계가 아닐까?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은 작가와 캐릭터의 미묘한 감정 속에서 일어나는 파문과 같다. 캐릭터가 현실 속으로 튀어나오면서 생긴 작가와 캐릭터의 관계는 불안함으로 가득차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정말 저렇게 마음대로 해도 될까?

캐빈(폴 다노)은 데뷔작부터 성공한 천재 작가로 인정받고 있지만, 두 번째 작품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는 창작의 벽에 부딪혀 아무 글도 쓰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캐빈은 그런 문제로 상담을 받던 의사의 조언대로 꿈에서 본 자신의 이상형을 글로 쓰기 시작한다. 꿈에서 본 것인지 아니면 상상인지 모를 모호한 글쓰기는 캐빈을 자유롭게 풀어준다. 독자나 출판사의 입장을 생각할 필요없이 순전히 개인 목적의 글쓰기에 빠져들면서 캐빈은 창작을 가로막는 장벽을 훌쩍 뛰어넘는다. 창작욕에 불타는 작가로 변신한 캐빈은 예전의 영광을 찾을 수 있을까?

캐빈이 만들어낸 루비(조이 카잔)는 오하이오 데이튼 출신으로 적당히 반항기를 가진 자유로운 영혼이다. 수줍은 캐빈과는 반대되는 성격이 바로 루비였다. 자신에게 결핍된 자질을 갖추면서 매력있는 루비는 캐빈이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게 된다. 루비도 캐빈을 마음에 들어하면서 둘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된다. 그러나 시작부터 루비와 캐빈의 관계는 비극이 예견되었다. 창작자와 창작물의 관계는 공평하지 않고, 창작자 마음대로 창작물을 바꿀 수 있는 불평등한 관계였다.

캐빈이 타자기로 치는 모든 일이 루비에게 일어난다. 불어로 말해보라고 하면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루비가 된다. 소설이 현실되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루비는 자유의지도 없고, 캐빈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노예같은 존재다. 그런 상황에서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이건 사랑이 아니라 노예계약과 같다. 더구나 루비는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 자신에 대한 자각도 하지 못한다.

속박된 루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자신의 감정과 상관없이 누구를 사랑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영혼이 없던 시절 그 영혼을 불어넣어준 창조자에게 사랑을 느껴야 하는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사랑의 감정은 당연하게 느껴야 하나. 자유의지 따위는 허락되지 않는 거지 같은 상황 속에서 낭만이나 사랑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루비의 시각에서 영화를 만든다면 더 흥미로운 관점과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수 있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틀안에서 살아가고 사랑해야만 하는 일이 과연 좋기만 할리가 없다.

서로 대등한 입장이 아닌 사랑은 결국 파국을 맞게 마련이다. 힘을 가진 자가 약자를 착취하게 되면 사랑의 감정을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상처만 남는다. 이 영화는 관계에서 오는 착취를 다루고 있지만, 비극적 상황까지 몰고가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마음대로 소유하려는 욕망이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 맛보기만 보여주고 그 상처를 적당히 봉합한다. 그 봉합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만족할만한 결말이다. 원하는 상황을 다 줄 수 있는 창조주라도 그 피조물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통제가 잘 이루어진다고 해도 행복까지 보장할 수는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이의 관계가 일방적이라면 그건 사랑도 아니다.

In Category: 문화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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