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빨 대중문화 블로거가 뽑은 추천도서

이런 생뚱맞은 글을 쓰게 된 이유부터 밝힌다. 내 블로거 이웃 foog님이 내준 어려운 숙제 때문이다. 좌빨 블로거가 추천하는 도서 캠페인에 나를 끼워넣었다. 나는 유명한 좌파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들에게 책을 추천할 만큼 대단한 독서가도 아니다.

그동안 읽었던 책들이라곤 딱딱한 사회과학서 뿐이었다. 그것도 논문을 쓰기 위해서 조각조각 잘라서 읽었다. 어려운 개념이 난무하는 책을 추천했다가 책에 대한 증오심이나 키우게 되지 않을까 고민했다. 부족한 독서를 탓하며 시간을 흘러보내기엔 숙제가 너무 부담스럽다. 빌린 돈이나 신세는 빨리 갚지 않으면 전전긍긍하는 소심한 성격이라서 뭉개고 있을 수도 없었다.

먼지 쌓인 책장을 뒤지다가 든 생각은 평소대로 하기로 결심했다. 솔직히 이론서는 내가 읽어도 재미없고 어렵다. 학자들이나 읽을 법한  책을 이 블로그에 소개한다는 것 자체가 격에 맞지 않다. 나도 지식인이지만, 지식인들이 어려운 문자로 지식을 포장해서 잘난 척하는 꼴은 보아넘기기가 쉽지 않다. 학술지가 아닌 대중지에서도 그런 과시욕을 발휘해서 이론가와 개념만으로 대부분을 채우는 이들의 심리가 뭘까.

어디 쉬운 좌파 대중문화책이 있을까? 많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이 영어권 도서들이라서 선뜻 권하기 어렵다. 내가 전공한 분야가 신문방송학에서도 좌파학문이라는 ‘문화연구’다. 그 뿌리가 영국 버밍햄학파인데, 이들은 신좌파 계열의 학파다. 그렇다보니 영국 노동계급의 문화나 영국 미디어에 관한 연구라서 한국 현실과 많이 다르다.

이런 이론을 한국에 잘 소개한 학자 원용진이 쓴 ‘대중문화의 패러다임’이 있다. 일반인도 알아듣기 쉽게 이론을 풀어서 한국 사례에 적용했다. 다만 전국노래자랑에 대한 과도한 해석은 부담스럽다. 영국학자 존 스토리가 쓴 문화이론과 대중문화 (Cultural Theory and Popular Culture)는 이 분야에서 소문난 명저이고 게다가 쉬운 영어로 되어 있어서 약간의 영어실력만 있다면 원서로 읽어보길 권한다. 원서가 부담스럽다면 한국어로 번역된 책도 있다. 번역도 꽤 무난한 편이다.

이론서보다 한국 대중문화 현상을 소개하는 글이 더 필요하다. 지식의 보따리상이란 말이 있다. 소위 외국에서 유행하는 학자의 이론을 국내에 소개하는 이를 말한다. 국내에서 한때 푸코나 들뢰즈 같은 학자나 포스트모더니즘이 마치 패션유행처럼 불어닥친 적이 있다. 물론 이런 소개를 해줄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학문 사대주의적 경향이 지나치게 커지면 자생적인 학문의 기반이 형성되기 어렵다. 급기야 맞지도 않는 현상을 어거지로 이론이 끼워맞추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서구의 시선으로 한국의 대중문화를 해석하려고 드는 걸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한다. 오리엔탈리즘이 내면화될 때 타자의 눈으로 한국문화를 전근대적이고 미개한 것으로 평가하게 된다. 이런 시각을 벗어나는데도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다행히 한국 대중문화를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려는 연구가 늘어나고 있다. 한국 근대의 여성, 일상, 사물, 언론에 대한 대중서도 발간되고 있다.

이 글에서 내가 추천하려는 책은 바로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 18권 세트이다. 1945년 해방부터 1999년까지 한국 현대사를 살피는 방대한 보고서다. 좌우의 시각을 비교적 균형있게 싣고 있는 점도 마음에 들며 무엇보다 1차자료가 풍부해서 그 시대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논문, 학술서, 신문, 잡지, 자서전, 소설까지 뒤져서 당대를 그대로 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워낙 부지런하고 다작인 강준만은 이 책을 통해서 가능한 다양한 의견을 담으려고 했다.

정규 역사교육에서 우리가 배운 건 승자들의 시각이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 다시 씌여진다고 하지 않았나. 한국사회에서 기득권을 잡고 있는 반공우파의 논리에 따라서 좌파의 기록은 죄다 지워졌다. 한국에 좌파가 없었던 게 아니라 철저하게 말살되어서 배울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대학에 들어와서 박세길의 ‘다시쓰는 한국 현대사’ 같은 책으로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거의 종교가 된 반공, 반공 종교에서 좌파는 입에 올리기도 힘든 금지어가 되었다. 지금은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좌파의 역사는 재조명해야할 부분이 너무 많다.

강준만의 이 책은 제목처럼 산책 나와서 읽을만한 게 아니다. 원고지 2만 5천 장이 넘는 글은 마음먹고 봐도 한참 걸린다. 나도 아직 읽고 있는 중이고 80년대까지 밖에 구하지 못했다. 이번 여름에 가면 90년대도 구해서 읽어볼 계획이다. 좌우에 균형있는 분량을 배분해서 서술하고 있어서 한국에서 우파가 득세하게 된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

또 하나의 추천의 이유는 바로 대중문화에 대한 서술이 강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역사서가 정치경제사를 다룬 것이 주류인데 미디어 학자인 강준만은 정치경제사와 더불어 대중문화와 언론에 대한 서술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쓴 ‘대중문화의 겉과 속’이 동시대 대중문화를 다룬 것이라면, ‘한국 현대사 산책’는 대중문화의 시대적 변화를 살필 수 있게 한다.

이 시대 한나라당의 역사적 뿌리를 알게 되면 더 잘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을 통해서 보수의 입장이나 진보의 숨겨진 이야기도 들어보면서 종합적인 시각을 키울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에서 역사교육이 지나치게 홀대를 받고 있다. 심지어 영어로 역사를 가르치겠다니 어처구나가 없다. 미국에 와서 놀라게 된 사실은 미국인들은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누구보다 자신들의 역사를 소중히 생각하게 중요하게 가르친다는 거다. 부끄러웠던 흑인차별을 기억하기 위해서 흑인의 달을 만들어 중요한 흑인 인물을 함께 배우기도 한다. 우리도 좌파의 달 같은 걸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고백하건데 나는 늦둥이 좌파였다. 대학생일 때는 내 개인적 고민에 매몰되어 사회적 문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따지자면 중도 우파 자유주의자였다. 하지만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막시즘을 접하게 되었고 자본주의를 분석할 수 있는 이론으로 이것보다 나은 게 없음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 공부하러 오면서 자본주의 천국이라서 좌파들이 별로 없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내 주위에 교수나 대학원생의 태반이 막시스트다. 문제는 미국사회에서 좌파들은 대학에 주로 몰려있다는 거였다. 학교와 학교 바깥에서 느끼는 사회적 온도의 차이가 너무 커서 놀라웠다.

이 글 말고도 미국 좌파에 관한 책을 따로 소개할 예정이었다. 많지 않지만 미국 좌파의 시각으로 미국의 대중문화를 소개하는 것이 내 블로그의 본질이다. 나는 좌빨 블로거라기보다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 속에 살고 싶은 대중문화 블로거다. 우파가 기득권을 가지고 그들의 의견이 상식인양 어거지를 피우는 꼴을 도무지 참고 보기가 어려워 이렇게 나선 것이다. 민주적이고 균형있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나라도 소수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 뿐이다.

원래는 세 명을 추천하라고 했지만, 나는 은둔형 재야블로거라서 추천을 권할 정도로 친한 블로거가 거의 없다. 아마도 응해 주지 않겠지만, 나보다 훨씬 내공이 강한 생각의 재료님께 이어받아 주길 권해본다.

In Category: 문화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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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g 2009년 3월 12일, 4:49 am

    강준만씨… 참 독특한 인물이죠. 그래도 그런 지식인이 한국에 존재한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나저나 “다만 전국노래자랑에 대한 과도한 해석은 부담스럽다. ” ㅋㅋㅋㅋㅋ

    • 류동협 2009년 3월 13일, 12:18 am

      책이나 다른 매체로 꾸준히 사회비판을 하는 부지런한 학자죠. 다른 건 몰라도 성실성 하나는 많이 부럽습니다. foog님도 꾸준한 블로그글을 쓰시잖아요. 그런 면에서 비슷한 것도 같네요. ^^

  • 노란전차 2009년 3월 14일, 5:54 am

    은둔형 재야 블로거라니요. 유명 블로거시면서 ^^;;
    현정이랑 시국 이야기하면서 울분을 토할 때 한국 현대사 산책을 살짝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언제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 류동협 2009년 3월 14일, 10:17 am

      과찬이십니다. 세밀한 서술과 묘사 덕분에 좀더 구체적으로 한국을 느끼게 해준 책이죠. 시간이 나시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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