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실용의 덫

“중도실용”은 비정치적이고 합리적인 말처럼 들린다. 우선 “중도”는 정치적으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제3의 길인 적당한 중간지대를 지키겠다는 말이다. 양쪽의 견해를 적절히 타협해서 중간지점에서 화해하겠다는 걸 누가 반대하겠나. “실용”은 실질적 성장이나 이익이 나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본다. 경제성장을 최상의 과제로 여기는 현대의 가치관에 잘 맞는 가치임에 틀림없다.

중도실용이 좌파와 우파 논쟁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정치라고 찬양하는 무리들이 있다. 황석영도 중도실용의 가치아래 좌우파가 함께 모일 것을 주장했다. 과연 중도실용이 그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비정치적이며 합리적인 미래를 약속할 수 있을까? 중도실용이라고 주장하는 이명박 정부는 과연 새로운 정치세력인지 의문이다.

경쟁만 강조하고 공존을 거부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를 뼈대로 삼은 이명박 정부는 중도라고 볼 수 없다. 촛불을 탄압하고 노조를 억압하고 일반시민까지 때려잡는 우파가 자신을 중도라고 주장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중도라면 공포정치를 할 것이 아니라 우파나 좌파 가릴 것 없이 그 견해를 들을 수 있는 관용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중도의 가면을 쓴 극우가 아니라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실용”은 또 뭔가. 경제적, 실질적 이익이 되기만 하면 뭐든지 그만이라는 논리다. 윤리나 정의같은 가치는 이익의 뒤로 물러난다. 실용의 세계에서는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지 나만 잘 살면 된다. 누구나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실용은 그런 게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실용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이 자신만 잘 살 수 있는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비윤리적 인간이라도 최대한 이익을 생산하는 인간이라면 최고의 대우를 받을 것이다.

실용적 세계 속에서 사회적 약자는 비실용적 인간으로 재빨리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장애인, 여성, 동성애자, 비정규직 노동자, 외국인 같은 비주류가 설 자리는 더욱 줄어들게 된다. 강자와 약자의 경쟁은 시작부터 공정하지 못하다. 타고난 자원을 많이 가진 자가 쉽게 승리할 수 있는 구조이다.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행위는 비효율적 비용으로 여겨질 것이다.

실용적 관점은 사회적 연대를 반경쟁적이라고 생각한다. 경쟁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지만 경쟁만 강요하고 연대를 부정하는 세계관은 타인을 모두 적으로 여기게 된다. 경쟁에 밀려나지 않기 위해 남을 짓누르고 일어나야 하는 이런 세상에서 과연 누가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동료는 없고 적만 득실대는 세상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변태가 틀림없다. 경쟁 속에서 늘어나는 건 적대감 뿐이다.

우파를 중도라고 속이고, 일부 소수의 이익을 전체 사회의 이익이라고 우기는 말이 바로 “중도실용”이다. 상위 1퍼센트의 행복을 지키려고 애쓰는 정부가 중도인가. 그걸 행복한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소설가의 상상력은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 ‘대단한’ 상상력으로 소설을 쓴다면 조지 오웰의 “1984”를 뒤집은 현실이 아닐까. 그 소설은 현실풍자가 아니라 지옥을 천국이라고 선전하는 선동이 될 것이다.

이 글과 맥락은 다르지만 묘하게 들어 맞는 내용의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인용한다. 배우관을 염두하고 한 말이지만 예술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표현은 다른 분야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다. ‘사람이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 연기만 잘하고 실력만 좋으면 되지.’ 그건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넌 공부만 잘하면 된다, 성공하기 위해선 모든 걸 다 짓밟고 사람 배신하라’고 가르치는 거랑 똑같은 거다. 차라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준다고 말을 하지 말든가.

정재영, 텐아시아 인터뷰

In Category: 사회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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