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운명을 믿나요?

매치 포인트 (Match Point, 2005)

Match Point

영화 매치 포인트(Match Point)의 첫장면은 영화가 전달하려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테니스 코트를 오가던 공이 네트에 걸려서 위로 살짝 튕겨 올라가서 멈춰버린다. 공이 어느 코트로 떨어지는지 보여주지 않은채, 삶은 우연의 연속이라는 의미를 던져주며 영화가 시작된다. 나중에 영화를 보면 알게 되겠지만, 허공에 멈춘 공은 주인공의 운명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내가 기대한 건 우디 앨런(Woody Allen) 영화의 대표적 정서인 수다스러운 뉴요커 코미디였지만, 이번 영화는 지독한 블랙 코미디였다.

운명의 힘에 이끌인 인간의 이야기는 우디 앨런 자신의 인생과 겹쳐진다. 35살의 나이차이와 한국입양아와 유태인 뉴욕커의 문화적 차이를 넘어선 자신의 사랑도 운명적 만남이다. 그리고 뉴욕을 배경으로 기획했던 <매치포인트>가 제작자를 구하지 못해서 런던으로 장소를 옮긴 것도 운명이다. 실제로 BBC FILM이 공동 제작에 참여하였다. 맨하튼을 떠날줄 모르던 우디 앨런이 런던으로 가다니. 이 영화를 마치고 우디 앨런은 또 한편의 영화를 런던에서 만들고 있다. 우디는 당분간 런던의 매력에 푹 빠진 모양이다.

우디 앨런의 영화들은 코미디, 뮤지컬, 미스테리, 드라마 등 한 장르에 구속되지 않고, 다채로운 성격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매치 포인트는 장르로 구분하자면, 미스테리 스릴러 블랙 코미디라고 해야 할거 같다. 스토리만 따지고 보면, 매치 포인트는 “치정살인극”을 다룬 코엔 형제의 파고와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가깝다. 신문 범죄기사를 극화시켜 놓고, 무미건조한 사건 서술을 심리 묘사가 잘된 소설로 발전시킨 그런 구조이다. 왜 많은 감독들은 신문 한구석을 장식한 범죄를 재구성하는데 관심을 가지는 걸까? 감독마다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특정한 범죄 자체가 의미있어서는 아닐거다. 적어도 매치 포인트는 인생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노력한대로 결실을 맺을 수 있다라는 뻔한 교훈을 들려주지 않고, 그 반대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우디 앨런의 인터뷰를 들어보자.

우리 모두 인생을 자기 맘먹은대로 할 수 있을거라 믿고 싶어하죠.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인생은 자기가 만들어가는 거라 늘 말하죠. 만일 우리가 열심히 일하기만 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어요. 맞아요, 열심히 일하는건 무척 중요하죠.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운에 따라 좌우되는 걸 인정하기 두려운 거죠. — 우디 앨런 인터뷰 기사 중에서

크리스 (조나단 라이 메이어스)는 아일랜드 출신 전직 테니스 선수다. 지금은 귀족들이 회원제로 출입하는 테니스 클럽의 코치로 근근히 생활을 연명하는 처지이다. 하지만 크리스는 가난한 자신의 신분에 어울리지도 않게, 도스도예프스키의 소설을 읽고, 오페라를 좋아한다. 크리스는 자신의 계급적 취향에서 자유로운 순수한 영혼이 아닌가? 그렇게 믿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크리스의 취향은 우연히 결정된 게 아니라, 철저히 계획된 계산적 취향이다. 상류층과 어울리기 위해서 차근차근 준비하여 “만들어진 취향”이다. 크리스는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상류층 자제인 톰(매튜 구드)을 절친한 친구로 사귄다. 마침내 크리스는 연마된 사교의 기술을 이용하여 그렇게도 원하던 신분상승을 한다. 크리스는 템즈강이 내려다 보이는 최고의 아파트에서 톰의 여동생인 클로이(에밀리 모티머)와 결혼생활을 멋지게 시작한다.

크리스와 달리 톰과 클로이는 자신의 노력으로 그 자리에 오른게 아니라, 우연히 부유층 집안에 태어난 행운아들이다. 상류층과 어울리기 위해서 자신의 취향도 바꾸어야 했고, 갖은 거짓말 해야 하는 크리스의 삶은 고단하다. 마치 첫장면에서 봤던 네트를 치고 떠오른 공처럼, 크리스의 삶은 어디로 떨어질지 모를 위태위태한 운명이다. 운이 좋다면 상류층의 삶을 누리는 코트로 안착하겠지만, 그 반대로 비참했던 자신의 계급으로 다시 추락할 수도 있다. 자신이 지금껏 이룩한 지위를 지키기위해 노력하는 열정적인 노력파가 크리스이다. 크리스는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과 마법의 힘을 빌릴 수 있었던 신데렐라가 아니다. 크리스는 모든 일을 처음부터 혼자 배우고 노력해야만 보다 인간적인 인물이다.

영화가 여기서 끝나버렸다면 아주 싱거운 성공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톰의 약혼자인 미국인 배우 노라의 출현부터 시작된다. 크리스는 첫눈에 자유분방한 노라(스칼렛 요한슨)의 매력에 빠져든다. 위로 올라가기에도 급급한 크리스는 어쩌자고 노라와 밀회를 즐기는 걸까? 노라와 크리스는 비슷한 처지에 놓인 서로를 동정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는 중반부로 넘어가서 미스테리로 방향을 확 틀어버린다. 나머지 이야기를 여기서 다 해버리고 나면 재미없으니, 이쯤에서 줄거리를 접기로 하고, 크리스에게로 돌아가 보자. 크리스는 한마디로 출세지향적 속물이다. 영어로는 이런 놈들을 소셜 크라이머(Social Climber)라고 한다. 계급의 피라미드를 올라가는데만 신경을 쓴다고 해서 나온 말인듯 하다. 착한 주인공들과 달리, 크리스는 착한 구석을 조금도 찾아보기 힘든 정말 구제불능 인간이다. 친구도 한명없고, 가족과도 연락하지 않는 철저히 이기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크리스는 주제파악도 하지 못하고 순종적인 클로이를 두고 바람까지 서슴없이 피운다.

거짓말도 밥먹듯이 하는 크리스에게 인간다운 모습은 도무지 없어보인다. 하지만 크리스는 게으르지 않고 노력하는 성실파다. 그점 하나는 높이 사줘야 하나? 그게 없었다면 몸뚱아리 하나로 그자리까지 올라가긴 힘들었을 거다. 크리스의 인생은 코트를 오가는 공처럼 끊임없이 움직인다. 자~자~ 한계단 더 올라가기 위해서는 잠시도 쉴틈이 없다.

영화 제목도 테니스 용어에서 왔듯이, 크리스는 영화의 결말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다. 인생은 테니스 게임이다. 게임이 끝나면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한판도 질 수 없는 크리스는 운보다 노력으로 살아야 할 운명이다. 어떻게 보면 크리스는 노력하면 성공한다라는 교훈의 화신이다. 우디 앨런이 인터뷰에 말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노력보다 운에 따라 결정된다라는 말을 반박하고 몸으로 실천한 인물이 크리스다. 그렇다면 우디 앨런은 자신의 인터뷰와 모순된 영화를 만든 건가?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천재는 99퍼센트의 노력과 1퍼센트의 영감으로 결정된다는 경구도 있다. 얼굴이 못생겼다면, 성형수술을 하면 그만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더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나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거나, 운동선수나 연예인으로 출세할 수도 있다. 아니면 크리스처럼 부잣집딸이랑 결혼해서 단숨에 신분상승을 할 수 있다. 그런 성공신화의 주인공은 과연 몇명이나 될까? 성공하기 위해서는 착하기를 포기해야만 하고, 크리스처럼 철저하게 남들을 속여야만 한다. <매치포인트>는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서 악하게 변한 사람에 모든 책임을 지워야 하는지 의문이 들게 만드는 영화다. 가난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사회체제가 문제가 아닌가? 매치 포인트는 이런 의미를 직설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친절하게 들려주는 담백한 영화다. 매치 포인트는 기존의 우디앨런의 수다스러운 영화들과 달리 상당히 차분하고 서정적인 장면이 가득한 영화다.

크리스는 쉽게 동화될 수 없는 인물이지만, 연민이 서서히 가는 인물인건 분명하다. 매순간 매치 포인트에 득점하고 올라가야 하는 바닥 인생에 놓인 사람은 더욱 고단하다. 까르띠에같은 명품과 고급 아파트에 취한 크리스는 동화속 세계에서 신데렐라로 살아남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다. 동화속 신데렐라는 착하게 살아서 보상받지만, 크리스는 악하게 살수록 더 많은 걸 가질 수 있다. 계급 사다리의 한참 위에 살고 있는 착한(?)사람들은 크리스의 악함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크리스의 악한 인생의 결말은 영화로 확인해보자.

오마이뉴스에 기고

In Category: 문화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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