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과 물에 대한 영원한 은유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Life, and Nothing More…, 1991)

Life and nothing more

영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끊어져 버린 길을 벗어나 샛길을 따라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단순히 물리적인 길의 복구 차원을 넘어서 상실된 인간 관계의 회복의 문제로 봐야한다. 길의 존재 이유는 단절된 지역들을 연결시키고, 또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데 있다. 그러나 이 영화 속의 길은 이미 정상적 형태의 길이 아니다. 지진 발생 후에 길은 끊어지고 산사태로 묻혀서, 길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삶의 전반적인 절망의 상황에서 새로운 삶을 복구하는 것이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사명이다. 영화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톨게이트에서 들리는 라디오의 해설을 통해서 우리는 길이 이어지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된다. 물리적인 길이 사라져 버린 틈을 방송 매체가 메워 주고 있다. 이를 통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영화작가는 길은 이어진다는 끝없는 확신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대중매체로서 영화가 삶에 주는 희망을 함축하는 것일 수도 있다.

평탄한 길이 이어지는 곳에는 시멘트 공장, 텔레비전 송신탑, 푸른 숲이 아무런 문제없이 서 있다. 푸야가 잠이 들고, 긴 터널을 통과하고 나서는 폐허로 된 거리가 갑자기 나타난다. 온통 부셔진 건물의 잔해들을 복구하는 인부들과 뭔가 쓸만한 물건을 찾기 위해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인다. 어둡고 컴컴한 내면의 굴을 통과하고 바라본 세상은 비틀려 있고, 무너져 버렸다. 외면적으로 볼 때는 세상은 튼튼한 시멘트 공장처럼 단단한 구조물을 만들어 내지만, 내면으로 볼 때는 그렇게 탄탄한 것이 못되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삶에 대한 문제의식 제기에서 시작되어 여행을 하듯 천천히 해결책을 찾아서 영화는 흘러간다.

감독의 차가 앞뒤로 늘어선 차들에 꽉 막혀서 오도가도 못하고 서있다. 길이 가지고 있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다. 우리는 감독과 더불어 경적소리, 싸이렌 소리와 교통체증 때문에 짜증이 나기 시작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모두들 어디론가 가고 싶어서 이동하지만, 차들의 행렬로 인해 길은 마비된다. 앞도 보이지 않고,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막힌 길에서 벗어서 영화작가는 샛길로 들어선다. 샛길로 들어서는 순간, 영화작가는 길을 개척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정확한 방향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봐야 한다.

대화를 나누는 것은 비록 일시적이긴 해도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막혀버린 길은 버리고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길을 놓게 된다. 사람들 사이에 놓인 길은 도로와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고, 빠르게 소통할 수 없다. 하지만 형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무한한 사람을 수용할 수 있고, 지진으로도 부셔지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코케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은 커진다. 가끔은 코케에서 온 사람에게 직접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아미드의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은 해체된 관계를 새로이 짜는 관계회복에 속한다. 만일 큰 도로로 간다면, 원하는 것을 영원히 얻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지진이 일어난 후에 사람들은 친구, 친척, 가족을 잃어버리고, 관계가 심하게 훼손되었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픔은 나누지 않고, 그들에게 가는 것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고, 결국은 서로에게 상처를 다시 안겨주는 것이 될 것이다.

관계의 회복은 과연 무엇에 관한 것인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아미드와 네마자데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 이상이어야 한다. 여행을 같이 떠난 감독과 그의 아들과의 관계 회복도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영화작가는 아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윽박지른다. 아들이 ‘이주’시키려고 잡아온 멧두기를 버리도록 명령하고, 자라고 한다. 멧두기는 해로운 곤충도 아닌데, 영화작가는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들에게 자기 말을 듣도록 강요한다. 또한 간헐적으로 감독의 타인에 대한 이해부족을 느낄 수 있다. 월드컵을 보기 위해 안테나를 세우는 이들을 비웃는다. 그는 지진이 일어날 때 경기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경기인지, 브라질과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인지 조차 헷갈려 한다. 또 지진이 일어났을 때 결혼식을 거행한 신혼부부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본다. 감독을 둘러싼 모든 이들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관계가 회복될 수 없다. 관계의 재구축의 기반이 되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청년과 감독의 동행은 이해의 한 측면을 엿보게 해준다. 그 장면에서 카메라가 점점 멀어지면서 지그재그 길을 넓게 보여준다. 이해를 바탕으로 한 관계를 보다 큰 맥락으로 보여주고, 둘이 나아가는 길이 시원하게 뚫려 있음을 확인해 준다.

창 틀로 바라보는 시점이 자주 등장한다. 창틀을 통해서 지진이 지나간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거리감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관찰자의 시선으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고, 때로는 시점숏으로 흔들리는 바깥을 보여주기도 한다. 감독이 소변을 보다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따라서 걸어갈 때 흔들리는 시점숏이 나타난다. 감독의 의식에 동요가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전체적으로 차 안의 세계와 차 밖의 세계로 구분하고 있지만, 서로 넘나들며 그 경계를 흐려버린다. 극단적인 시점숏의 감정이입이 일어나기도 하고, 먼 곳을 보여주다가, 다시 확대해버려 거리감을 급격히 떨어뜨리기도 한다. 주체와 대상과의 거리는 줄어들었다가, 늘어났다가 하면서 경계를 없애고, 유동성을 지니게 된다.

궁극적으로 길은 흐름이라는 속성을 지닌 물의 은유이다. 관계를 이어주고,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것은 물이고, 그것이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 길이다. 물은 명확한 형체를 가지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나 가 닿을 수 있는 차별 없는 공평한 매개물이다. 물은 땅속으로 스며들기도 하고, 강물이 되어서 흐르기도 한다. 물은 길이 할 수 있는 모든 영역을 포괄하여 넘어선다. 길이 갈 수 없는 곳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지진이나 전쟁으로도 막힘이 없이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흘러갈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샘물에 수도를 꽂아서 물을 끌어다 쓴다. 큰 물줄기에서 생명의 근원을 빌어오고, 공유하는 물의 흐름에 동참하는 것이 된다. 푸야는 동네 아낙네에게 샘물을 얻어 마시고, 그녀 큰딸의 죽음에 관해서 듣는다. 영화작가는 자동차 라지에타에 쓸 물은 소녀에게 얻고, 그녀 집안의 참사를 듣는다. 물은 개방되어 있으며, 그것 때문에 사람들의 말문을 트여 주고 대화를 하게 된다. 강처럼 눈에 보이는 흐름은 아니지만, 잠재적으로 사람에서 사람에게로 흐르는 관계망을 형성하는데 물은 중요한 기능을 한다. 물은 계속해서 어디로 흘러간다. 영화 속에 나타나는 변기, 할머니의 주전자, 물 조리개, 수도꼭지 등은 물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차와 차가 만나면, 교통사고나 교통체증을 일으키지만, 물과 물의 만남은 힘찬 강물이 되어 흐름을 이어간다. 물은 증발되더라도 다시 비가 되어서 내리는 영원한 흐름을 지킬 수 있다.

길이 꿈꾸는 것은 물처럼 흐르는 것만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길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길 자체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은 객관적인 실체이다. 만일 길이 좋은 쪽의 소식만을 전달한다면, 도덕적인 입장에 서서 불완전한 역할만 수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진의 피해로 가족 모두를 잃은 할머니, 외삼촌을 잃은 소년의 이야기까지 길은 포용한다. 단지 길은 관계를 맺어줌으로써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숨김없이 전해준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같이 나누는 한 더 나빠지지는 않는다. 소외는 흐름이 이어지지 않고 맺혀 있는 것이다. 흐르는 것이 생명은 본질이라고 한다면, 흐르지 않는 소외는 죽음이 된다. 감독도 푸야도 길가에서 소변을 본다. 만일 소변을 보지 못한다면, 고통스러운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또 물을 얻어 마실 수가 없다면, 갈증으로 탈진하게 될 것이다. 길에도 물이 가지고 있는 생명성이 내재되어 있다. 결국 감독이 험난한 길로 코케로 찾아가는 여정은 관계를 살리는 일이다. 물이 하는 대로 따라하면, 관계를 맺어주는 길이 열릴 것이다.

사운드의 차원에서도 연속성과 단절성이 대립되고 있다. 초반부에 우리는 경적 소리와 싸이렌 소리를 반복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싸이렌은 무엇인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을 알리고, 경적 소리는 막힌 길을 재촉하는 다급함을 표현한다. 자연스러운 의식에 이런 잡음들이 끼어들면 생각에 잠길 수도 없고, 그 소리에 현혹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소리는 결국 주의를 집중시키며 흐름을 멎게 만들고 있다. 후반부로 갈수록 잡음보다는 인간의 대화 소리가 자주 등장하고, 협주곡의 연속성 있는 부드러운 음악이 울린다. 인간의 육성은 단절적이지 않고, 대화체에서 질문과 대답의 자연스런 결합으로 흐름을 이어간다. 푸야는 아버지를 부르고, 아버지는 계속 푸야를 부른다. 호명과 대답의 결합을 통해서 관계의 이어짐과 회복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In Category: 문화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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