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신자유주의’라는 신조어

얼마전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정체성을 “좌파 신자유주의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볼때, 좌파와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도무지 조화하기 힘든 개념들이다. 홍세화가 반박하는 글을 통해서 노무현의 좌파와 정치적 좌파가 어떻게 다른지 분명히 밝혔지만, 한마디 거들고자 한다. 내가 판단하는 노무현은 분명히 중도우파 신자유주의자이다. FTA추진에 적극적이고, 시장을 통한 개혁을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논리를 순봉하는 노무현을 어떻게 좌파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한국 사회는 이미 신자유주의 사회로 접어들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시장이 활짝 열린 사회로 진행되고 있다. 만일 노무현이 이러한 흐름에 반하는 세력의 편을 들고 있다면, 그를 좌파라 불러도 무방하다. 하지만 현실은 시장논리로 교육, 복지, 문화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노무현은 분명히 기득권 신자유주의자인데, 여전히 좌파라고 자신을 주장하는 그 의도가 궁금하다. 우파정책을 추진하면서, 좌파 유권자들의 인심을 얻어보려는 얄팍한 전략이 아닐까? 대통령 당선 당시 지지기반이었던 서민, 노동자, 좌파들이 대부분 그에게 등돌린 상황에서 나오는 역설적인 발언으로 들린다. 다시 되찾고 싶은 지지기반에 대한 공허한 메아리다. 그렇지만 현재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그대로 추진하면서 좌파도 포괄하려는 의도다. 서로 앙숙인 좌파와 신자유주의을 묶으려는 의도는 애초부터 잘못되었다. 그래서 그의 신조어는 한번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는 우리 사회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얼마나 좁은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극우파를 벗어나면 모두 좌파라고 몰아세우는 논리가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군사정권시절 극우파의 주장과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빨갱이로 몰아세우고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관습이 있었다. 하지만 “좌우”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과거의 좌파가 오늘의 우파가 되는 세상이다. 노무현은 좌파에서 우파로 아주 멋지게 변신하였다. 그렇지만 주류 우파 지지세력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외로운 상황이다.

나는 정치평론가도 아니고, 내 글의 목적이 순수한 좌파적 의미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관심있는 건 문화산업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이다. 신자유주의 철학자인 Robert Nozick은 그의 책 <무정부, 정부 그리고 유토피아 (Anarch, State, and Utopia)>에서 시장사회는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문화적 유토피아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는 완전한 자유주의 세계가 도래하면 개인들은 자유롭게 라이프스타일을 고르고, 자신만의 문화를 창조하게 되는 다양한 개인들로 거듭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장사회가 제공하는 선택의 폭이 얼마만큼 넓을까? 반문하게 된다. 극장에 걸리는 영화판에서 헐리우드 영화들 가운데 선택할 자유정도라면, 그걸 유토피아라고 말할 수는 없다.지금의 시장이 소비자의 선택만으로 결정되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독점자본이라는 거대한 손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서 시장을 통제한다.

프랑스는 연간 3억달러를 문화산업에 투자하며, 1만2천명을 고용하여 자국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리고 자유경쟁시장에서 문화적 예외적 조항을 마련하여 세계적 흐름으로 관철하려고 노력한다. 스페인, 프랑스, 브라질 등의 나라들은 스크린 쿼터제를 시행하고 있고, 프랑스와 스페인은 자국의 텔레비전에도 비슷한 논리를 적용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 신자유주의화는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

앞으로 전지구화를 통한 개방이 촉진될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개방이 그 나라의 경제나 문화에 이익이 된다는 논리는 납득하기 어렵다. 식민지 독립후에 자발적인 발전을 꾀하던 아프리카의 수많은 나라들의 상황을 보면, 정 그 반대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은 그에 비하면 나은 조건이긴 하지만,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다. 아프리카의 자원을 노리면서 접근한 유럽의 다국적 기업들이 자행한 횡포로 아프리카 자국경제는 물론 문화적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무분별한 자원을 싼값에 약탈하고, 토착적 문화에 대한 몰이해는 서구적 문화를 중심에 놓았고, 결국 전통적 가치가 미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마찬가지로 남미의 영화산업도 미국영화의 진출로 회복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타문화의 이입이 가져다 주는 이익도 분명히 존재한다. 자국의 문화만으로 불충분한 부분을 다른 문화가 채워줄 수 있고,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무분별한 개방은 취약한 경제적 구조를 가진 자의 패배를 가져온다. 시장을 통한 경쟁은 결코 문화의 질을 향한 경쟁이 아니다. 그리고 다양성이 문화적 질을 반드시 향상시킨다고 볼 수는 없다.

문화적 다양성이나 질의 향상이 결단코 목적이 아닌, 신자유주의는 이윤의 극대화가 중요한 가치다. 자유경쟁시장을 최대한 확보하는 게 어떻게 좌파의 정신세계와 통하겠는가? 현재 기득권을 가진 자본가계급의 이해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우파의 논리가 신자유주의다. 공정한 경쟁은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가치가 되었다.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경쟁을 통한 다양성은 뭘까? 공정한 경쟁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막고, 다양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아도르노가 말했던 표준화된 다양성과 비슷하다. 그 나물에 그 밥인 셈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가 가져다 주는 미래가 희망적이지 않을 수 있다.

In Category: 사회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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