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중년에 찾아온 사랑, 라스트 찬스 하비

라스트 찬스 하비(Last Chance Harvey, 2008)

예전에 영화를 평가할 때는 감독 위주로 보았지만 요즘은 배우가 더 눈에 들어온다. 연출이나 시나리오만 좋으면 영화는 당연히 잘 될거라 생각하던 젊은 시절의 치기 때문이었다. 물론 연출이나 대본도 중요하지만 배우가 연기로 형상화시키지 못한다면 영화는 형편없는 삼류로 전락할 수 있다. 그 반대로 연기가 영화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줄 수도 있다. “라스트 찬스 하비”는 더스틴 호프만(하비)과 엠마 톰슨(케이트) 두 배우의 불같은 연기만 보더라도 아깝지 않은 영화다.

아마도 “비포 선라이즈”을 중년배우로 찍으면 이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노년에 가까운 남자가 공항 술집에서 40대 후반의 여자에게 말을 걸고 있다. 얼핏 생각해도 그다지 낭만적인 장면은 아니지만 이 둘 사이에 묘한 감정이 서서히 타오르고 있었다. 십대의 불꽃같은 사랑은 아닐지 모른다. 오히려 중년의 사랑이 십대보다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편견일지도 모른다.

하비는 회사에서도 짤리고 딸의 결혼식 입장마저 계부에게 뺏긴 불쌍한 처지다. 그러나 그는 이 순간 묘하게도 자신을 이해해줄 여자를 만나게 된다. 사랑은 준비된 순간에 오지 않고 느닷없이 나이에 상관없이 찾아온다. 하비와 케이트는 그렇게 우연히 만나서 하루를 같이 보낸다. 두 사람은 거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비포 선라이즈”가 20대의 청춘이 파리의 거리를 거닐며 사랑의 감정을 키우는 영화라면, “라스트 찬스 하비”는 쓸쓸한 중년이 런던의 거리에서 조심스럽게 마음을 여는 과정이다. 멜랑꼴리한 중년의 느낌을 잘 살릴 수 있는 도시는 파리보다 런던이 더 잘 어울린다.

재즈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던 하비는 텔레비전 광고 음악을 작곡하는 삶에 적당히 타협하며 살고 있었다. 그는 부인과 이혼하고 딸과 관계도 소원하다. 그의 텅빈 눈빛이 설명하듯이 하비는 철저하게 외로운 사람이다. 케이트도 하비에 지지 않을 정도로 외롭다. 아버지가 비서와 바람나서 가정을 버리고 떠나자 엄마는 어린애처럼 케이트에게 모든 걸 의존하며 하루에도 열두 번 이상 전화를 해댄다. 케이트는 40대 후반이 되도록 혼자 사는 노처녀다. 하비나 케이트는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고 외롭게 근근이 살고 있다. 홀아비 처지는 과부가 알아주는 법이다. 외로운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하비와 케이트는 바에서 만나는 순간부터 이야기를 들어주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중년의 사람이 완전히 낯선 타인을 만나서 교감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타인의 뒤에 버티고 있을 배경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두려워진다. 상대를 아무 조건 없이 그냥 받아들이는 일은 20대 청춘에게도 만만한 일은 아니다. 케이트가 하비의 딸 결혼식에 가서 그 안에 있는 하비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비말고 아는 이 하나 없는 자리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파티장을 몰래 빠져나오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비가 재즈 피아노 연주로 케이트를 잡아주지 않았으면 그냥 스쳐갈 인연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중년의 사랑을 다룬 영화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다이앤 키튼과 잭 니콜슨이 주연한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Something’s Gotta Give, 2003)”도 인생과 낭만이 담긴 수작이다. 중년이 하는 사랑을 창피하게 생각하던 시각에서 바라보면 절대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다. 하지만 중년의 사랑을 별스럽게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죽는 날까지 사랑하는 건 사람의 타고난 운명이자 욕망이다. 영화관에서 청춘의 사랑은 지겹게 봤으니 사회의 다른 구성원인 중년들의 삶을 다룬 영화도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아도 이상할 거 하나 없다.

중년의 사랑이라고 해서 청춘의 사랑과 많이 다르지 않다. “라스트 찬스 하비”에서 키가 한뼘이나 더 큰 케이트가 하이힐을 벗고 하비와 키를 맞춘다. 서로에게 조금씩 맟춰주는 과정에서 사랑이 시작된다. 하비와 케이트가 만나서 끝까지 잘 사귀게 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서로 맞지 않아서 심하게 다툴 수도 있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순간을 몇 번이나 더 겪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에는 십대나 사십대나 육십대가 따로 없이 공평하다.

이 영화에서 약간 아쉬운 점은 하비와 케이트의 감정적 변화에 좀더 천착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런던의 풍경이나 상투적 장면을 줄이고 둘 사이에 나눈 대화나 심리묘사에 좀더 치중했더라면 중년의 사랑을 다룬 걸작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더스틴 호프만과 엠마 톰슨의 연기 하나는 정말 멋지다. 그것만으로 이 영화는 충분히 가치가 있는 사랑 영화다.

In Category: 문화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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