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랄한 10대의 임신 이야기

주노 (Juno, 2007)

“주노”는 10대 임신이라는 논쟁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렇게 심각해지지는 않는다. 영화 “헤어스프레이”가 인종갈등을 유쾌하게 풀어간 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즐겁다. 그렇다고 “주노”가 심각한 사회문제를 가볍게 여기거나 회피한다는 것은 아니다. 발랄한 관점으로 무거운 10대 임신을 생각해보자는 의도이다.

“양철북” 같은 다른 성장영화 속의 아이들은 너무 조숙하다. 성장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아이들은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에 어른들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런 사회적 자아가 잘 형성된 애늙은이가 들려주는 성장영화는 이젠 진부하다. 요즘 10대는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의 영향으로 끔찍할만큼 알 것은 다 안다. 하지만 주노는 요즘 10대처럼 애늙은이가 아닌 본능적인 아이다. 어쩌면 주노는 10대 청소년보다 원초적 본능이 살아있는 더 어린 아이다. 사회적 이목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행동하고 말한다. 한마디로 버릇없는 아이다. “주노”는 “어른아이”가 화자가 아닌 소위 ‘철없는’ 아이가 임신하며 겪게되는 이야기다.

반영웅 주노의 판타지

주노(엘렌 페이지)는 별로 예쁘지도 않고 능력이 뛰어나지도 못한 그저그런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주노가 영웅같은 주인공이었다면 10대 임신 문제를 멋지게 해결하고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까지 도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노는 이와 정반대의 “반영웅”이다. 주노는 가난한 집에서 아빠와 계모와 함께 사는 미성년자다. 그렇다고 어려운 상황을 해쳐나갈 비상한 재주나 머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주노는 “길버트 그레이프”의 길버트처럼 갑갑한 하루를 살아가는 반영웅이다.

설상가상으로 임신까지 한 주노는 점점 옴짝 달싹 못하는 처지가 되어간다. 이쯤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가 아주 우울하게 흘러갈 것이라고 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예상과 다르게 영화는 “주노”를 운명에 희생된 불쌍한 영혼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들은 씩씩하게 자기 살 길을 찾아나서는 주노를 만나게 된다.

내가 영화관에서 만난 관객들은 주로 30~50대의 여자들이었다. 자기 할 말은 다 하고 사는 솔직한 주노를 보면서 미국의 아줌마들은 아주 유쾌하게 웃어 제꼈다. 아마도 자기가 품은 생각을 남의 이목을 생각하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주인공을 보며, 세상의 규범에 익숙해져 살고 있는 미국의 중년 여성관객들은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10대보다 중년 여성들이 이 영화에 더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판타지적 요소를 반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주노는 현실에 찌든 중년여성들이 바라는 이상적이고 원초적인 10대의 모습은 아닐까.

성교육과 학교지도를 통해서 최근 10대 임신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나, 미국 사회에서 10대 임신은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10대 임신은 새로운 사회문제는 아니지만 그것을 직접 겪는 가정에게는 여전히 충격적인 일일 것이다. 평범한 미국 10대라면 주노처럼 부모님께 기세당당하게 임신 사실을 털어놓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미국의 평범한 부모라면 주노의 부모님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특히 주노처럼 하층계급의 부모라면 그렇게 쿨하게 행동하지 않고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당돌하지만 여전히 어린 주노의 성장

주노는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임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다. 이렇게 의젓한 주노지만 내면은 어린아이 같이 원초적이다. 가끔 주노의 당돌한 태도는 사람들을 어이없게 한다. 입양을 스스로 생각해내고 신문광고지에서 적당한 입양부모를 찾아낸 주노는 순순히 아이를 낳아서 주겠다고 하면서 그런 입양부모들에 대한 생각을 친구에게 말한다.

왜 여기에서 아이를 찾는지 모르겠어. 중국가면 아이팟처럼 공짜로 아이들을 나눠주는데 말야.

“주노”는 정치적 영화가 아니다. 주노는 낙태나 낙태 반대에 대해서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지만 주노는 낙태 반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지도 않다. 주노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현실적인 사람이다. 주노는 자기 삶을 감당하기 바빠서 10대 임신의 사회적 영향을 생각할 여력이 없다. 이 영화는 주노의 정치적 사상보다 개인적 심경 변화를 차근차근 따라간다.

주노가 꺼리김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사회화가 덜 되어서 가능한 일이다. 주노는 아이의 아빠인 블리커(마이클 세라)가 항상 곁에 있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임신 후 블리커는 냉랭하게 주노를 대하고 심지어 다른 여자랑 데이트도 한다. 사랑이 영원할거라 믿었던 주노의 상상이 여지없이 무너진다. 주노는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주노는 아이를 입양할 마크(제이슨 베이트만)와 바네사(제니퍼 가너) 부부에게서 행복을 본다. 마크와 바네사 부부는 전형적인 중산층 여피족이다. 이들은 전문직종을 가지고 있고 그림 같은 교외의 집에 살고 있다. 미술관 같은 집에서 동화처럼 살지만 사실은 행복하지 못하다. 아이에 집착하는 바네사와 락커의 꿈을 포기한 마크는 속으로 곪아있다. 이들의 비밀을 알아버린 주노는 또한번 절망한다. 그리고 주노는 아이들 가질 수 없는 바네사의 슬픔을 이해한다. 이런 깨달음을 통해서 주노는 조금씩 성장한다.

사계절 동안 사랑, 결혼, 아이를 경험하면서 주노는 많은 것을 배운다. 주노는 정신적으로 미숙하지만 육체적으로는 충분히 성숙한 10대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산경험을 통해서 주노는 서서히 성인으로 커간다. 주노의 성장은 판타지적 세상에 더이상 머무를 수 없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잠시나마 이 판타지 같은 영화로 해방적 일탈감을 누렸던 중년여성들은 영화관을 벗어나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관객들은 원초적 본능대로 살 수 없는 세상에 잠시 위로하러 나타난 주노와 이별을 아쉬워한다.

“주노”는 10대의 임신, 입양이라는 심각한 상황을 다루면서도 발랄하다. 주노가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발랄함을 버리지 않았으면 하고 기대해본다. 주노의 매력은 사회적 편견에 주눅들지 않는 건강함이다. 그녀의 건강한 정신은 우리에게 10대 임신 문제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해주었다. 현실에 억눌리지 않은 판타지 같은 캐릭터 주노를 통해서 사회문제를 새롭게 사고할 수 있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서 기사가 되었습니다.

In Category: 문화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Show 6 Comments
  • 프랭키 2008년 2월 17일, 7:33 am

    안그래도 제 후배가 이 영화를 재밌게 봤다고 해서 궁금해하던 차였습니다. 일단 영화를 보고, 동협님 리뷰도 다시 읽어봐야겠군요. ^^

  • 류동협 2008년 2월 17일, 2:04 pm

    프랭키 — 저는 이 영화를 꽤 신선하게 봤습니다. 주노라는 캐릭터가 좀 통쾌하더군요. 프랭키님은 어떻게 보셨는지 나중에 슬쩍 알려주세요. ^^

  • foog 2008년 2월 19일, 10:31 pm

    웬지 포스터를 보고 슈퍼배드가 연상되었는데 아닌게 아니라 슈퍼배드에 나왔던 그 십대배우가 나오는군요. 여하튼 기대되네요..

  • 류동협 2008년 2월 20일, 1:28 am

    foog — 수퍼배드가 재밌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언제 한번 빌려봐야겠군요. 저도 기대됩니다 ^^

  • syd K. 2008년 2월 20일, 11:56 am

    ……우연의 일치겠지만 갑작 제니, 주노가 생각나는…

  • 류동협 2008년 2월 20일, 2:29 pm

    syd K. — 너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 아무래도 10대 임신을 다루는 이야기인데다 “주노”라는 이름이 겹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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