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자

호튼 (Horton Hears a Who, 2008)

호튼은 밀림 속에 사는 착하고 엉뚱한 코끼리다. 유난히 크고 예민한 귀를 가진 호튼은 우연히 먼지 속에서 들린 소리를 듣고 먼지덩어리 속에 사람이 산다고 믿는다. 정글의 다른 동물은 호튼의 말을 믿지않고 그를 이상한 동물로 몰아 부친다. 호튼과 가장 강하게 대립하는 동물은 캥거루다. 캥거루는 밀림 공동체에서 회합을 조직해서 호튼이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고 대중을 선동한다.

소수의 가치를 존중하는 호튼의 시련

‘호튼’은 소수와 다수의 대립을 다룬 동화이다. 소수가 다수와 싸워서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호튼은 끝까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먼지덩어리 속 사람들을 지키려고 안전한 장소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믿음과 불신이 강하게 충돌하는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다. 다수의 불신이 한명의 믿음을 부수고 폭력을 행사하는 건 낯선 장면이 아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닥터 수스(Dr. Seuss)가 1954년 맥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절에 썼다. 그래서 ‘호튼’은 자유민주주의란 이름으로 단지 사상이 다른 공산주의자를 마녀사냥했던 맥카시즘의 분위기와 아주 흡사하다.

다수가 믿는다면 무조건 따라야 할까. 다수가 파시즘에 빠져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는 아닐 것이다. 소수이거나 힘이 없는 사람들은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역사가 있다. 여성의 참정권이 주어진 것도 20세기였고, 흑인 노예를 인간으로 여기지도 않았던 야만적 사고가 지배하던 시기가 있었다. 중세에는 죄없는 여자를 마녀로 몰아서 화형시키기도 했다. 다수가 항상 진리는 아니다. 그래서 다수결의 원리로 모든 걸 결정하는 건 위험하다. 다수결에는 다수의 광기를 견제할 장치가 없기 때문에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호튼은 소수의 가치를 인정하고 지키려는 ‘수호자’다. 캥거루는 권위와 관습만 믿고 새로운 사실이나 믿음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관료주의자다. 순수한 호튼은 사람들을 웃기는 재주가 있지만 남을 설득하는 재주가 없다. 영리한 캥거루는 캠페인을 조직해서 단숨에 호튼을 위험한 반사회적 인물로 낙인찍고 마녀재판을 벌인다. 비슷한 예로, 한국의 보수언론과 보수파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뜻에 거스르는 말을 하는 사람을 모두 빨갱이로 몰아서 사회적 살인을 한다. 한번 빨갱이로 낙인 찍히면 국가보안법에 따라서 감옥에 가야하고 사회생활은 다시는 할 수 없는 무서운 정치적 현실이다. 밀림의 동물이 모두 몰려와서 호튼을 감옥에 가두고 먼지덩어리가 들어있는 클로버를 끓는 물에 넣으려는 상황은 다수에 의한 소수의 폭력의 절정을 보여준다.

상대적 소수 ‘후빌’의 운명

호튼과 똑같은 운명인 먼지덩어리 속 세상 후빌(Whoville)의 시장은 다수의 믿음과 싸운다. 후빌을 책임지는 시장이지만 세상 바깥에 더 큰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어서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힌다. 호튼처럼 쫓기는 신세는 아니지만 위기에 처한 후빌을 지키려는 자신의 노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민들이 야속하다. 시장은 후빌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독재자가 아니므로 시민의 동의를 구하려고 계속해서 노력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시장의 아들 죠죠도 공동체에 섞이지 못하는 외로운 소수자이다. 마냥 행복하고 사회성 좋은 96명의 시장의 딸과 달리 긴 머리에 반항기 가득한 눈으로 혼자서 지내는 외톨이다. 하지만, 소수자 죠죠는 후빌을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다한다. 위기에 빠진 다수를 구하려고 온 몸을 던지는 소수의 가치가 죠죠를 통해서 드러난다. 죠죠와 시장이 없었다면 후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수호자 호튼도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후빌과 바깥 세상의 관계도 흥미롭다. 호튼이 사는 정글에 비해 후빌은 문명이 더 발달한 곳으로 나온다. 인간사회처럼 시장이 통치하고, 국회 비슷한 곳도 나와서 민주사회와 유사하다. 하지만, 후빌은 덜문명화된 바깥 세상에 비해 나약하다. 동물의 왕국의 법칙인 야생의 지배를 받는 문명사회에 대한 은유다. 야만의 다수가 문명의 소수를 지배하는 관계가 성립된다. 유일하게 호튼만이 소수의 후빌을 지키려고 할 뿐이고 나머지 동물은 후빌을 파괴하려고 한다.

대우주 정글에 사는 동물들은 소우주 후빌의 존재를 부정하며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후빌의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우리, 여기 있어요!”라고 힘을 합쳐 외치는 모습이다. 소수들이 다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소수의 목소리에 아무도 귀기울여 듣지 않고 언론마저 외면한다면 소수의 의견은 잡음으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요즘 한국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언론악법 논쟁이 떠올랐다. 공영방송을 다 죽이고 보수신문사, 기업체가 언론을 소유하게 되면 다수의 힘있는 보수의 목소리만 소통되는 파시즘의 사회가 될 것이다.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호튼은 한국사회에서 사라지게 된다.

‘호튼’에서 또 기억나는 대사로 호튼이 말하는 “아무리 작은 사람이라도 사람은 사람이다” 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소수라 하더라도 소수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무조건 다수의 뜻에 따르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소수의 권리와 의견이 쉽게 무시되는 사회에 다양성은 없다. ‘다름’으로 낙인찍히는 걸 항상 두려워 해야하며, 집단이 비이성적 상황으로 치달려도 막을 길이 없다. 획일적 집단 속에 다른 소수는 이물질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인정하고 보듬을 수 있어야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후빌에 비교해서 상대적 다수인 정글도 더 큰 우주를 만나면 소수가 된다. 연쇄적으로 이어진 소우주와 대우주의 고리를 생각할 때 누구나 소수가 될 수 있다. 호튼은 소수가 되는 순간에도 위험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지향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해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와 소수를 편가르기 하는 사회에는 다수에 속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으로 떠는 불행한 군중만이 있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파시즘’ 사회 속에 살아가는 양심있는 ‘소수’는 생각해볼 주제다. 아무리 작고 다른 사람이라도 사람은 사람이다. 소수 의견이 존중되는 다양성의 사회을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더 많은 호튼이 필요하다.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In Category: 문화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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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군 2009년 1월 11일, 6:40 am

    이 영화 아주 재미있게 본 영화중의 하나입니다. 의미도 아주 깊은 영화이고요…모든 면에서 아주 탁월한 재미를 주는 그런 영화입니다…월이도 상당히 재미있고 말입니다…어찌 보면 동일 선상에서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되는군요…소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는 자세…필요하지요…쥐박이가 이걸 알려는지, 원…

  • 류동협 2009년 1월 11일, 7:13 pm

    단군 — 원작이 워낙 유명한 것도 있겠지만, 영화로 잘 옮겨놓은 것 같습니다. 재미와 의미를 함께 균형있게 추구한 작품입니다. 소수의 목소리를 짓밟은 세상이 오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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