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도 경쟁력이 된 사회

KBS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한 한 여대생이 “키가 180이 안 되는 사람은 루져”라는 말을 해서 난리가 났다. 외모나 겉모습이 점점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이런 생각이 유별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개적 장소에서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것을 입에 담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요즘 기준으로 “루져”가 되지 않으려면 키는 커야 하고 몸은 말라야 하고 얼굴은 작아야 한다. 슈퍼모델에 가까운 몸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루져(Loser)가 된다. 르네상스 시대라면 풍만한 몸이 이상적인 몸이겠지만 요즘은 잡지 화보에 등장하는 가늘고, 길고, 탄탄한 몸이 승자다.

“루져(Loser)”는 미국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흔하게 쓰이는 말이다. 경쟁이 일상화된 미국사회에서 가장 모욕적인 말이 “루져”다. 하루하루가 경쟁의 연속인 사회에서 “루져”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경쟁에서 성공하는 이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루져라는 말이 이렇게 흔하게 쓰인다면 경쟁사회에 진입한 것이다.

“루져” 발언이 사회적 문제가 된 한국도 경쟁사회로 불러도 전혀 낯설지 않다. 대학은 교양이나 학문을 닦는 장이 아니라 취업준비 학원이 되었다. 토익점수로 영어실력을 늘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전자제품에나 쓰던 스펙(spec)이란 말이 그 사람의 능력을 뜻하게 되었다. 사람을 판단할 때도 내면이나 인간됨을 따지기보다 숫자로 확인 가능한 토익점수나 학점이면 충분한 사회가 되었다.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스펙을 높여야 하는 각박한 경쟁사회가 되었다.

이제 외모나 겉모습도 “루져”를 정의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경쟁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 키높이 구두를 신어야 하고 성형도 해야한다. 경쟁에 밀려서 루져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다. 선천적으로 어느 정도 타고나는 키마저도 루져의 범주에 들어가야 하는 현실은 숨 막히다. 루져 발언에 화를 내는 정도는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비례한다. 과연 그 후폭풍은 무서울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학력평가와 영어점수로 평가하고 높은 순위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길들여진 사람에게 “루져”라는 말은 무시무시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이미 다 자란 키 때문에 루져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억울하다. 그렇게 화가 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분노가 한 여자에게 핵폭탄이 되었다. 그 발언과 상관없는 사생활이 털리고 주변사람들과 학교까지 괴롭히는 상황은 영 아니다. 그 분노는 금기된 “루져” 발언을 한 사람이 아닌 경쟁사회라는 괴물에게 쏟아져야 마땅하다.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경쟁은 반드시 필요한걸까? 경쟁을 우선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지구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경제제도인가? 예를 들어, 수백 개의 기업이 한 제품시장에서 경쟁을 시작하게 되면 수많은 경쟁의 결과로 결국 한두 기업만 남게 된다. 이때부터 경쟁은 의미가 없어지고 독과점이 된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기업이 마음대로 가격을 올려도 소비자는 다른 대안없이 그 물건을 살 수 밖에 없다. 이게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경쟁이라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소수에게 양심이나 윤리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대를 이기는 것이지 함께 잘 사는 문제가 아니다.

경쟁 말고도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 다 함께 서로 도우며 사는 방식에서 나온 게 복지다. 경쟁신화에 찌든 미국도 의료보험을 개혁하여 공공복지개념을 도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경쟁만으로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었다. 상대를 무너뜨리고 살아남는 경쟁에서 장애인, 노숙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약자는 숨쉴 수도 없다. 이들의 숨통을 틔워주고 함께 살 수 있는 방법도 있는데 경쟁만 강요하는 건 옳지 못하다.

모든 경쟁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모든 일을 경쟁으로만 해결하려는 것이 잘못이다. 패자를 패자로 부르며 놀리는 사회는 이미 병든 사회다. 루져 혹은 패자를 모욕하는 말을 한 학생의 잘못만 나무라고 그 뒤에 버티고 서있는 경쟁사회에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외모뿐 아니라 모든 것에 줄을 세우고 순위를 매기는 사회는 잔인한 괴물이다. 180이라는 숫자는 토익 950점이 되고, 거기에 미달하는 사람을 “루져”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선 안된다. 경쟁신화가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사회는 수많은 “루져”를 만든다.

연애상대를 고르는 개인적 취향인 키나 외모에도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경쟁 논리가 개입되는 세상이다.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잣대가 인간의 몸으로 옮겨가는 사회는 경쟁사회의 결정판이다. 몸도 마음도 승리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 현실은 고달프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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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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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년 11월 17일, 10:05 am

    사람들은 류동협 님처럼 깊게 생각하지 못합답니다. 자신의 분노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르고, 눈에 보이는 가장 쉬운 대상을 공격하지요. 어떤 생각 없는 여자가 그러한 발언했더라도 제작진이 알아서 편집을 했어야 하는데… 노이즈 마케팅이거나 정말 생각이 없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 류동협 2009년 11월 17일, 12:34 pm

      맞는 말씀입니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공영방송 제작진이 문제의 발언을 편집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크죠. 사람들의 분노가 그렇게 터진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 합니다. 저는 좀더 큰 그림으로 분노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한번쯤 생각해봤으면 하는 뜻으로 몇자 적어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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