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슬픈 초상

시티 라이트 (City Lights, 1931)

City Lights

채플린의 영화를 보면, 코미디의 분위기 아래로 흐르는 진한 페이소스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웃음기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웃을 수 있는 만큼의 울음을 동시에 담고 있는 것이다. 이 두가지 감정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어울어지기도 어려운데 이 영화는 그 경계선을 넘나드는 재미를 알게 해준다. 엄밀한 의미에서 채플린의 코미디는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슬픔을 감춘 내면적인 영화이다. 무성 영화의 특성상 대사로 처리해야 할 것을 몸짓으로 대신하려다보니 다소 과장된 면도 있지만, 감추어진 것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우울한 감정은 부분적으로 영화 속에서 해소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권위, 힘에 억눌려 있다.

시티 라이트의 첫 시퀀스에서 채플린은 좀 엉뚱하게 등장한다. 시장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대중이 모여 있는 곳에서 연설을 하고, 차례로 몇몇 저명인사가 소개된다. 동상을 공개하기 위해서 천을 치우는 순간에 채플린은 거기에 누워서 편안하게 자고 있다. 동상이 보여주는 권위와 위엄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한다. 동상은 기득권 세력이 가지고 있는 허위의식을 상징한다. 그는 그 위에서 발로 밟고, 엉덩이로 덮어버린다. 사회적인 약자인 채플린은 동상 위에서는 약자가 아니라, 권위를 마구 짓뭉개는 자유인이다. 동상 위의 조그만 시위는 시장과 경찰이 제지하려고 하지만, 채플린은 예기치 않은 일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지연시키고 있다. 단순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채플린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암시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현실과는 달리 약자와 강자와의 관계가 역전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현실 속에서 느낀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고 통쾌한 웃음을 지을 수 있다.

우선 채플린이 선사하는 웃음의 이면에는 불안감이 잠재한다. 채플린 특유의 걸음걸이를 보면서 웃지만, 언제 넘어질지 모른다는 염려가 깔려있다. 한 쪽 다리를 절뚝거리는 듯 좌우로 왔다갔다하는 모습은 언제나 불안하다. 만일 그런 걸음 때문에 길에서 넘어지면, 우리는 불안감보다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안도감이 들것이다. 그러나 그는 쉽게 넘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길을 간다. 불안감은 웃음 속에서 계속 숨어 있게 된다. 예를 들어서 채플린이 쇼윈도 속의 모형을 쳐다보는 장면에서 뒤에는 구멍이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지만 아슬아슬하게 넘어지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그 상황을 다 알고 있지만, 그는 전혀 모르고 있다. 극적인 아이러니를 사용해서 채플린은 그가 가지고 있는 불안감을 우리가 동참하도록 만든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는 불안을 그가 영화를 통해서 명백히 보여주려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채플린은 약한 사람을 보면 도울 줄 아는 사람이다. 눈 먼 소녀가 파는 꽃을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팔아준다. 또 부인과 이혼한 부자가 자살하지 못하게 막아준다. 채플린의 신분도 남을 도울 처지가 못되지만,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도우려고 한다. 자신의 처지를 망각할 만큼 타인에 대한 배려가 남다르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딱한 처지의 채플린이 더 힘든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소녀를 돕기 위해서 청소부로 취직하고, 권투 시합에 참가해서 흠씬 두들겨 맞는다. 또 부자의 돈을 얻어 가져다주고 감옥에 들어가고 만다. 채플린에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런 고생을 할 필요 없이 적당히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약자를 돕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 비록 그가 어려움을 감당할 능력이 없지만, 실제 행동에 옮길 줄 안다. 하고 싶어하는 일과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 사이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절망감을 느낀다. 채플린이 스크린에 활기차게 움직이고, 능력 있는 체 행동하면 더욱 공허하게 다가온다.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자기부정과 저항의 발산의 다름이 아니다.

약자의 측면에서 채플린, 백만장자, 장님 소녀는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 부자의 경우는 이중적이기는 하지만, 부인을 잃고 술에 취해 자살하려는 면은 약자의 처지를 드러낸다. 직업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채플린과 가난한 장님 소녀는 말할 것도 없는 약자이다. 백만장자는 신분상으로 그들보다 우위에 있지만 도울 줄 모른다. 백만장자가 술에 취해 있는 동안은 채플린과 동질적으로 되어 소녀를 돕지만, 술이 깬 후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채플린을 배척한다. 묘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채플린은 술이 취한 백만장자와 친구가 된다. 채플린은 자기가 백만장자처럼 행세를 하며 장님 소녀를 지속적으로 돌봐준다. 세 명의 사이를 맺어주는 고리는 술과 거짓말이다. 이 고리는 약하고,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리기 쉬운 만큼 불안감을 내포하고 있다. 그들 사이의 관계는 채플린이 감옥에 들어감으로써 파국을 맞게 된다. 하지만 소녀는 더 이상 장님이 아니고 버젓한 꽃가게의 주인이 되어 있다. 서로 의존적인 인물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존재로 거듭났지만, 여전히 채플린은 불안하고 고개 숙인 모습을 하고 있다. 소녀와 채플린의 관계는 역전되어서 지속되고 있다. 여전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들의 관계는 대등하지가 않고, 한 쪽으로 기울어 있다.

채플린은 주변인으로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집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잠을 자야 하고, 직업이 없기 때문에 바쁘게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그는 소속감이 없는 불안을 가지고 어슬렁거리지만, 자유롭게 길을 선택해서 다닐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도 제멋대로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그 나름대로의 리듬에 맞춰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촬영시 대부분이 풀샷으로 찍혔는데도 별로 갑갑하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화면을 꽉 메우고는 있지만, 계속해서 왼쪽과 오른쪽으로, 위 아래로 분주히 리듬감 있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채플린이 어느 지점에서 고정되어 있다면, 답답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연출되었을 것을 경쾌한 몸놀림을 통해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권투 경기 시퀀스에서 채플린, 심판, 상대 선수는 전혀 권투를 하고 있는게 아니라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 빠른 몸놀림을 통해 채플린은 심판 뒤에 숨어서 상대 선수를 교묘히 공격하고, 상황이 어려워지면 재빨리 상대 선수를 껴안는다. 이 시퀀스는 풀샷이 기본적으로 가져다주는 갑갑함을 벗어나 즐거운 시각적 유희를 제공한다. 이 시퀀스를 통해서 단적으로 주어진 상황이 암울하고 답답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낙관적인 전망으로 이를 극복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채플린이 현실부적응자, 주변인이라는 사실은 그의 절뚝거리는 걸음과 모자라는 듯한 행동을 통해 표현되었다. 소녀를 돕기 위해서 취직을 하지만, 거기에서도 실수를 연발하고 동료들과 직장 상사로부터 질책을 받는다. 채플린이 떠돌이라는 것과 그를 도와줄 친구가 없다는 것은 현실에서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그는 현실에 적응하고자 하기보다는 현실을 비난하고 자기식으로 현실을 재편한다. 그가 감옥에 가게 되는 것도 억울한 그의 심정을 잘 드러내 준다. 백만장자를 도우려고 했지만, 그가 도둑으로 몰려 감옥에 가야한다. 자기가 현실에 적응할 수 없는 이유를 이 사건을 통해 명백히 주장하고 있다. 그가 사회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파티 시퀀스에 잘 드러나 있다. 채플린은 파티에서 만난 여자가 준 호루라기를 가지고 놀다가 삼켜 버린다. 숨을 쉴 때 마다 호루라기 소리가 나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만, 이내 방에서 쫓겨난다. 밖으로 나가서도 마찬가지로 택시기사의 비아냥 거림을 받는다. 개들만이 반가워서 그에게 달려든다. 채플린은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보다는 개들의 세계에서 오히려 환영받는 존재가 된다.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을 때 채플린은 개들을 몰고와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산다. 집 안과 밖 어디에서도 채플린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역설적인 호루라기를 불고 있다.

눈먼 소녀를 통해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도록 유인하고 있다. 우리는 백만장자처럼 이기적이고 남을 생각할 줄 모른다는 점에서 장님이라고 할 수 있다. 채플린의 장난과 웃기는 상황만 보고만다면 역시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을 놓친 셈이 된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채플린의 애정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은 짙은 고독이 담겨있는 것이다. 고독을 처절히 느껴본 채플린은 그 고독의 깊이를 알고 있다. 장님 소녀가 느꼈을 고독은 그의 고독과 맞닿아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녀는 채플린이 준 돈으로 개안을 하게 된다. 사회의 정상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소녀를 바라보는 채플린은 클로즈 업된 표정은 슬프다. 서로를 이어주던 고독이라는 고리가 연민, 동정으로 바뀐데서 오는 거리감일 것이다. 마지막에 채플린과 소녀가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교감을 느꼈을까. 만일 롱샷으로 그 장면을 처리했다면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었겠지만, 클로즈 업속의 채플린의 눈에는 슬픔이 고였다. 예전에 동질감을 느꼈던 소녀가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는 이질감에 대한 실망 때문일 것이다. 결말에서 다시 혼자가 되어버린 채플린을 통해서 나는 그 운명적이며 비극적인 고독을 보았다.

In Category: 문화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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