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속의 또다른 식민지

차이나타운 (Chinatown, 1974)

chinatown

영화 “차이나타운”에는 다양한 권력관계와 식민성 내재되어 있다. 영화의 주축을 이루는 플롯인 댐건설을 둘러싼 이권 다툼 세력에도 있다. 수자원의 소유주였던 크로스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방해 세력인 멀웨이를 살해한다. 살아 있는 크로스는 멀웨이를 죽여서 자신의 권리를 지켜 나간다. 루 형사 반장은 예전의 동료였던 사설탐정 키티스를 수사권으로 압박한다. 백인 미국인 주인은 하인 중국인을 지배한다. 키티스는 비서인 엘리스를 지배하고 있다. 이들의 지배관계와 그 식민성을 떠나서 차이나타운을 이야기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이 지배와 종속을 둘러싼 갈등 속에 폭력과 히스테리가 발생한다. 댐에서 물이 방류되는 것은 이들 세력의 싸움을 의미하며, 동시에 지배 세력의 권력이 세고 있는 것을 암시한다. 이 영화는 구조적으로 지배권의 승리로 돌아가며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다. 한 편의 영화 속에 현실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부조리가 드러나 있으며, 그것들이 어떻게 정당화되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차이나 타운은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보고서, 바꿔 말해서 보수 세력의 건재함을 알려주는 것이다. 보수성에 대한 냉소와 풍자는 60년대 당시 미국의 상황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다.

영화의 중심 플롯이 되는 수자원 개발에 따른 이권 다툼은 크로스에게서 시작된다. 우리는 결말부에 가서야 비로소 크로스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의 막대한 영향력에 놀란다. 그 만큼 그의 존재는 은닉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는 숨어서 모든 일을 계획하고 중재한 것이다. 크로스가 상징하는 바는 사회를 주지하는 주도권을 가진 사람들의 비도덕성이다. 그들이 도덕적으로 떳떳하다면 일부러 숨어서 일을 꾀할 필요가 없다. 키티스가 사건을 추적해가는 선을 따라가면, 멀웨이의 치정, 멀웨이 부인으로 변장한 의문의 여인, 멀웨이 부인, 댐건설의 이권자들이다. 그는 처음부터 이 모든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 수사를 한 것이 아니다. 그는 크로스에게 이용당하다가 반격을 시도한 것이다. 키티스는 주도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실제 사건에 문제를 제기한 적극적인 인물은 바로 홀리스 멀웨이이다. 멀웨이는 LA 수력 자원부의 국장으로 일하지만 보다 거대한 세력이 벌이는 음모를 알고 있었다. 그 음모를 밝히는 과정에서 그는 살해되었다. 키티스는 멀웨이가 시작한 수사를 이어가는 것이다. 그의 수사는 의도적이지 않았지만 자신의 문제가 되었다. 키티스는 중심부에 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LA안에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

키티스가 중심부를 향해 하는 도전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멀웨이가 수사한 곳을 돌아 보던 중에 그는 괴한의 습격을 받는다. 물을 방류하는 댐 가운데 하나이다. 그곳에서 그는 두 가지를 잃어버린다. 구두 한짝을 강물에 빠뜨리고, 괴한의 칼에 코를 베인다. 구두와 코는 탐정으로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자질을 상징한다. 구두는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건을 수집하는 활동력을 의미한다. 그의 활동이 제한을 받고 있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코는 실마를 풀어가는 탐정이 가져야 할 주의력, 관찰력을 상징한다. 그가 코를 베인다는 것은 실마리 추적에 난관에 봉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시점에서 키티스는 더 이상 수사를 진행시켜 나가지 못한다. 키티스가 멀웨이를 염탐하는 과정에서 그는 매번 물세례를 당한다. 큰 물의 흐름은 역류할 수 없는 압도적인 권력의 힘을 확인하는 것이다. 물의 속성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이 흘러나오는 근원은 주도권을 쥔 중심부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댐을 건설하는 것은 생명력과 경제를 좌우하는 물을 독점하려는 자본주의의 발상이다.

그들의 권력 재현 방식은 직접적인 영향력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들의 주특기는 표면적으로 다른 대상을 내세워 비판을 막고 속으로는 이득을 챙기는 것이다. 크로스는 겉으로는 앨바코 크럽이라는 비공식 자선 단체를 만들어 노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면서 속으로 그들의 명의를 빌려서 이득이 되는 땅을 매입한다. 키티스는 크로스와 직접 싸울 수 없고, 단지 그들의 대리인과 대치한다. 키티스는 보이지 않는 존재와 투쟁을 하지만 결과는 그의 좌절로 끝난다. 키티스가 진실을 폭로하는 시점에 루 형사 반장, 러스 엘버튼 부국장 등은 크로스의 편이다. 이들은 오히려 희생량으로 애버린으로 삼고 있다. 크로스는 모든 사건의 종결을 위해서도 자신이 아닌 딸을 내세우고 있다. 크로스는 애버린을 정신병자로 몰고 그녀에게 총을 맞아, 결국 애버린을 죽이도록 꾸미고 있다.

크로스의 권력 지배는 사회에서 펼쳐지지만 본질적으로 가정에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딸을 강간해서 자신의 딸이자 손주인 캐서린을 낳게 한다. 애버린은 억압적인 관계를 피해서 멕시코로 달아난다. 근친상간이라는 가정내의 억압을 만들어낸 크로스는 그것을 사회 속에 확산시켜 나간다. 크로스는 멀웨이와 동업을 하지만 자신의 부를 키우기 위한 것이었다. 사회적 근친상간은 멀웨이와 동업 관계를 끝내고 그를 살해하는 것이다. 크로스는 힘든 때를 같이 견딘 사람들을 배신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권력을 키웠다. 그 방식은 고스라니 기티스에게도 적용된다. 크로스는 기티스를 많은 돈으로 두 번씩 고용하고 나중에 그를 죽이려 한다. 크로스는 모든 인간 관계를 식민성의 확장으로 보았다. 자신이 모든 사람의 생활 양식을 지배하겠다는 야욕으로 댐을 건설한다. 그는 상수원을 확보해서 자신의 뜻이 지배되는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타인들의 의도와는 상반되는 일을 하면서 그는 미래를 위해서라고 외친다. 크로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권력 의지에 종속된 인간 중에 하나이다. 그의 의지는 건전한 인간 관계를 해체해서 지배와 종속이라는 식민지적 인간 관계로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하부 플롯으로 작용하는 것은 차이나 타운과 LA의 대립이다. 시민들은 중국인들의 생각과 행동을 이상하게 바라본다. 세탁소에서 침으로 세탁하는 것을 처벌하고, 성관습과 습관을 농담을 여긴다. 중국인의 신분 계층은 애버린의 집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의 집에는 중국인 집사, 중국인 하녀, 중국인 정원사가 살고 있다. 그녀의 집이 바로 LA안의 차이나 타운 축소판이다. 중국인은 주변적인 인물로 중심부의 인물을 떠받들고 살아야 한다. 그들의 주변성을 구성하는 이질성은 본질적으로 보수성과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다.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이민자들은 눈에 가시와 같은 것이다. 중국인이 중심부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중국인들은 운명적으로 주변인으로 밖에 남을 수 없는 존재이다. 이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다. 기티스는 예전에 차이나 타운을 순찰했지만 그것에 대한 기억은 없다. 단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찬 상자쯤으로 생각했던 기티스가 자신의 직업을 떠난 이유도 그곳 때문이다. 하부 플롯으로서 차이나 타운은 중심부로 들어갈 수 없는 주변인의 상황을 보여준다.

차이나 타운의 운명적인 속성을 간직한 인물이 바로 기티스이다. 그는 형사 반장으로 진급한 자신의 옛 동료 루에게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미래가 될 수도 있던 자리를 동료에게 빼앗긴 데서 오는 상실감이다. 루와 기티스의 대립은 마지막으로 갈수록 강하게 증폭된다. 애버린을 잃어버린 기티스의 분노와 사건을 축소하려는 루의 대립은 절정을 이룬다. 기티스는 계속해서 루를 따돌리고, 거짓말을 하지만 결국은 루의 제도권에 제대로 항거도 할 수 없는 입장이다. 이것은 제도권 수사에 반발하는 월쉬와 더피를 고용한 기티스의 사설 수사권의 항변이다. 기티스의 항변의 목소리를 메아리치지 못하고 마음 속에서만 울린다. 기티스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동료들에게 끌려간다. “여기는 차이나 타운이잖아”라는 동료의 말은 자신의 한계와 주변성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남들의 뒷조사를 하며 돈을 돈 자신의 옛모습이 교차된다.

전반적인 지배와 종속의 식민성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다. 기티스가 몇 차례 폭행을 당하는 것 말고는 표면적인 대립은 나타나 있지 않다. 40년대 느와르 영화의 강한 흑백 대비가 여기에는 없다. 전체적으로 회색톤의 부드러운 그림자가 사용된다. 고대비의 색상보다는 중간톤의 옷을 입는 인물들이 평균적으로 배치된다. 스크린 내의 선명한 대비보다는 스크린 밖의 현실에 염두하고 있다. 기티스가 엘마콘도 아파트를 방문하는 장면이나, 애버린의 저택을 찾아갈 때 그는 스크린 밖으로 나가려 한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그를 쫓아가고 그는 벗어나려고 한다. 기티스와 애버린이 침대에 누워있을 때 두 사람은 각각 얼굴의 반쪽만 스크린 안으로 들어오고 나머지는 밖에 있다. 이런 방식은 스크린 내의 대비보다 스크린 밖의 현실과의 대비에 초점을 맞추기 위한 것이다. 현실의 강한 식민성을 바라보기 위해서 영화 안의 대비를 줄이는 것이다. 기티스의 심리적 흐름은 음향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불안감, 긴장감을 조성하는 음향이 증폭되면서 기티스의 심리는 요동친다. 계속되는 반전에서 기티스가 느끼고 있는 심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기티스가 하고 있는 수사의 종결점은 식민성의 폭로였다. 하지만 기티스가 하고 있는 말을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차바퀴에 묶이고 증인인 애버린은 총에 맞아 죽었다. 더 이상 그를 도와주고 대변한 존재가 없어진 것이다. 사건의 해결은 길을 잃어 미궁으로 사라졌다. 모든 현실의 일이 미국인의 의식에서 바라본 중국인 거리처럼 부조리하게 된다. 차이나 타운이 상징하는 부조리는 숨겨진 식민성이 합리적으로 변해가는 구조이다.

In Category: 문화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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