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드라마의 미국 공습

세계 방송산업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 때아닌 영국 드라마의 열풍이 세차게 불어닥치고 있다. “다운튼 애비”(Downton Abbey)라는 영국 귀족과 그 하인들 이야기를 다룬 시대극의 시청자가 무려 1,020만 명에 이르렀고, 다운튼 애비 페이스북 페이지의 팬이 이미 220만 명을 넘어섰다. 더군다나 함께 방송을 보며 파티를 즐기는 컬트팬들도 생겨났고, 티셔츠, 인형, 차 등 관련 상품은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미국 공영방송 PBS에서 방송되는 간판급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아워”(NewsHour)의 시청자가 270만 명인 것을 고려하면 굉장히 놀라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다운튼 애비 이외에도 PBS에서 크게 흥행한 “셜록”(Sherlock, 410만 명), “미스터 셀프리지”(Mr. Selfridge, 400만 명), “더 파라다이스”(The Paradise, 310만 명), “콜 더 미드와이프”(Call the Midwife, 300만 명) 등의 드라마는 전부 영국의 공영방송 BBC나 영국 민영방송 ITV에서 제작한 작품들이다. PBS에서 방송되는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영국에서 수입된 것이다 보니 어떨 때는 이게 영국 채널인가 하고 착각이 들 정도다. 오래전부터 다양한 영국 프로그램들이 꾸준히 방송되었지만, 이전에는 PBS의 시청률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들어 미국 내 영국 드라마의 인기가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방송계에서의 PBS의 입지가 과거보다 많이 높아졌다.

영국 드라마의 높아진 위상

물론 영국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채널이 PBS만 있는 것은 아니다. 1998년에 설립된 케이블 채널인 BBC America를 통해 시청자들은 “닥터 후”(Doctor Who)를 비롯한 다양한 영국 드라마를 볼 수도 있다. 최근에는 공중파 NBC도 소위 미국 내 영드열풍에 가세하며 “멀린”(Merlin, 530만 명)을 방송하기도 했다. 이는 과히 영국 드라마의 황금기라고 불릴 만한 열기다. 미국 텔레비전이 외국에서 제작한 드라마를 그대로 수입해서 방송하는 경우는 여태껏 그렇게 흔하지 않았다. 대체로 드라마의 기본 스토리와 캐릭터만 빌려오고 미국의 배우로 캐스팅하고 배경도 미국의 도시로 바꿔서 새로 제작하는 것이 예사였다. 영국 악센트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낯선 외국의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들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각색을 하다보면 극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스토리와 캐릭터를 가진 드라마라도 다른 느낌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릭키 저비스가 주연한 영국 코미디 드라마 오피스의 경우, 배경을 미국 펜실베니아주 스크래튼으로 바꾸고 캐릭터도 원작보다 덜 독하게 보이도록 바꾸기도 했다.

sherlock

미국 시청자들이 편하게 즐길 수 있게 각색한 드라마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영국 드라마 자체를 즐기는 시청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다. 영국의 독립제작사협회 (Producers Alliance for Cinema and Television)에서 밝힌 자료에 의하면, 2012년에 7억7900만 달러 상당의 영국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이 미국으로 수출되었고, 그 수치는 계속해서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HBO, Starz, Showtime 같은 미국 프리미엄 케이블 채널들도 공동제작을 통해서 영국 배우와 스태프를 고용해서 영국 로케이션을 통해 직접 제작하는 작품도 늘어나고 있다. 불법다운로드 사이트에서 1위의 위용을 자랑하는 HBO의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도 영국 배우와 제작진이 만드는 영국산 드라마다. 미국의 제조업이 값싼 노동력 때문에 중국으로 향했던 것처럼, 미국 영상산업이 영국으로 눈길을 돌린 것은 비교적 낮은 제작비에 비해 높은 수준의 배우들과 제작진 때문이다.

영국 영상산업의 저력

영국의 영상산업은 셰익스피어의 연극 전통에 바탕을 두고 발전해왔다. 앤소니 홉킨스나 톰 히들스턴이 나온 왕립드라마예술아카데미(Royal Academy of Drama Arts) 같은 전통 있는 연기 교육기관과 다양한 무대가 잘 갖춰져있어서 배우 교육과 훈련에 탁월한 편이다. 미국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영국 배우를 선호하는 이유도 이러한 배경에 있다. 이제 미국 드라마에서 영국 배우를 찾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우스(House)의 휴 로리, 파고(Fargo)의 마틴 프리만, 홈랜드(Homeland)의 데미안 루이스, ‘더 와이어’ (The Wire)의 도미니크 웨스트 등이 있고, 조연급까지 망라하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배우의 연기보다 스타에게 강하게 의존하는 미국 연예산업의 특성상 많은 미국 배우들의 연기 수준이 반드시 높다고 하기도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런던을 중심으로 연극, 텔레비전, 영화를 오가면서 탄탄하게 다져진 연기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비교적 낮은 출연료를 받는 영국 배우들은 미국 제작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미국식 악센트를 지도해 줄 코치만 구하면 바로 드라마를 촬영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개인적으로 영국 드라마를 접하게 된 계기는 미국 서점의 DVD 코너에서 시작되었다. 대부분 서점의 DVD 코너에는 영국 드라마만 따로 모아놓는 섹션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관심이 가는 작품을 발견하며 서서히 빠져들게 되었다. DVD나 비디오 대여서비스 넷플릭스를 통해 다양한 영국 드라마를 집중해서 보기도 했다. 최근에 방송되는 작품은 PBS나 BBC America에서 접하면서 더더욱 영국 드라마의 묘미를 느끼게 되었다. 아마 다른 미국인들도 이와 비슷한 경로로 영국 드라마를 접하며 즐기고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영국 드라마를 좋아하던 노년층만으로 최근의 영국 드라마 인기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근래에 갑자기 늘어난 영국 드라마 시청자는 인터넷과 DVD로 프로그램을 보는 젊은 층이다. 넷플릭스, 훌루, 아마존 같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영국 드라마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영국 드라마에 푹 빠진 사람이 많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영국 드라마 성공의 비결

미국의 온라인 잡지 슬레이트(Slate)에 의하면, 2013년 미국인 가정이 평균적으로 보는 채널의 수는 189개였다. 이는 5년 전 129개보다 훨씬 늘어난 수치이다. 그 많은 채널을 채우려면 프로그램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새로운 내용의 드라마에 대한 갈망도 그만큼 커지게 마련이다. 미국에는 500개가 넘는 텔레비전 채널이 있고, 온라인 비디오 대여사이트들이 그 시장으로 속속 진출하면서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수요를 채우고 있다. 영국 드라마는 바로 그 빈틈을 재빠르게 색다른 작품으로 채우면서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사실, 미국 텔레비전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강해지기 시작한 것은 드라마가 아니라 리얼리티쇼였다. 미국의 대표적 리얼리티쇼인 “아메리칸 아이돌”(American Idol)과 “댄싱 위드 스타”(Dancing with the Stars)도 모두 영국 프로그램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영국 리얼리티쇼 포맷을 사서 미국식으로 바꾸었는데 결과는 대박 흥행이었다. 이것 말고도 유행하는 리얼리티쇼의 상당수가 영국 프로그램이다. 영국 드라마의 유행도 이러한 영국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국 드라마가 미국 드라마보다 규모가 작고 특수효과가 약하지만, 대신에 배우의 연기나 스토리 구성은 전혀 손색이 없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제작비 규모의 약세를 창의성으로 극복하고 있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미국 드라마는 보통 13개나 24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 틀에 맞춰서 만들다 보니 안정적이지만 공장에서 찍어내는 듯한 기계적인 작품이 양산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국 드라마는 정해진 형식이 없고 비교적 느슨한 편이라서 뜻밖에 신선하고 재미있는 작품이 나오기도 한다. 영국 악센트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을 제외하면, 미국인한테 영국 드라마는 큰 언어적 장벽 없이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오락거리다. 미국인들은 자막을 읽기 싫어하는 점을 생각한다면 상당한 장점이 아닐 수 없다.

1980년대 “댈러스”(Dallas)나 “스타스키와 허치”(Starsky & Hutch)를 비롯한 미국 드라마가 영국의 안방극장을 점령하던 시절에 대한 역풍일까.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한 영국 열풍이 이제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 되었지만, 영국 드라마의 인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드라마계의 메이저리그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드라마에 새롭게 도전하는 영국 드라마는 나름대로 강점과 독특한 색깔이 있다. 한국에서도 “셜록”이나 “닥터 후” 같은 드라마가 히트하면서 컬트팬을 확보하며서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고 들었다. 중국 동영상 사이트 Youku.com에서 셜록 시즌 3을 방영했을 때 24시간 안에 5백만 뷰를 넘었다. 영국 드라마의 열풍은 이제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세계적 흐름이 되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 미국 드라마가 압도적인 주도권을 차지하고 있어서 아직 큰 영향은 없겠지만, 영국 드라마가 미국의 2~30대 계층과 다른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고 있으니 잘 지켜볼 일이다.

다독다독에 기고한 글입니다.

In Category: 미디어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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