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와 소비가 지배하는 미래

브라질 (Brazil, 1985)

공상과학 영화의 고전 중에 언젠가 한번 꼭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작품이다. 영화 “브라질”을 다보고 난 후에도 이해되지 않는 것도 많았고 모호하게 떠오는 이미지가 상당했다. 어쩌면 이건 애매하고 모호하게 이해되어야 할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마음이 차분해지고 “브라질’에 대해 가졌던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 있었다.

테리 길리엄 감독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는 “브라질”은 공상과학 영화의 고전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미래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있고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강하게 느껴진다. 비록 암울한 미래상을 보여주는 디스토피아 사회이지만, “브라질”은 현대사회의 부조리, 불합리에 기초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영국에 한정되지 않고 현재 한국사회에도 바로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공상과학 영화의 고전이다.

샘 라우리(조나단 프라이스)는 정부 하급공무원으로 기계적이고 나른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의 희망은 꿈 속에 나온 아름다운 여인을 구출하는 것이다. 샘이 속한 미래사회는 정부와 기업이 인간을 지배하는 숨막히는 세계다. 정부는 관료주의에 빠져 인간을 문서의 글자나 정보로 여기며 감시와 통제를 반복한다. 다른 한편으로 숨막힌 인간이 자유를 느끼는 순간은 소비다. 소비가 곧 행복이라는 신념을 인간에게 심어주면서 소비를 끝도 없이 권장하는 소비주의 사회가 미래다. 샘의 어머니는 성형중독에 빠져 틈만나면 젊어지는 수술을 받고 친구들과 식당과 백화점으로 소비하며 시간을 보낸다.

소비와 감시 가운데 영화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난 건 감시사회다. 거대한 정부건물이 상징하는 힘처럼 정부가 개인정보를 모두 통제하고 있다. 정부조직에 반발하는 테러리스트나 불평분자는 체포명령을 내려 경찰특공대가 잡으러 출동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전쟁을 연상시키는 경찰특공대가 무고한 시민을 잡아간다. 시민은 저항할 틈도 없이 당하고 잡혀가고 신속하게 처형된다. 문제는 체포명령서에 오자가 있어서 테러리스트가 아닌 비슷한 이름의 사람이 희생된 것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정부기관을 찾은 시민의 이웃은 정부의 잘못을 덮기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 이런 사회가 왠지 낯설지 않다.

샘은 이 잘못된 사건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다가 우연히 꿈에서 보았던 여자를 만나게 된다. 이 여자와 함께 정부감시를 피해서 모험을 하면서 영화는 미래사회의 잘못된 관료주의에 희생당하는 인간을 보여준다. 샘이 찾아간 무고한 시민이 살고 있던 아파트는 가난한 계층의 거주지다. 관료주의의 희생양이 되는 것도 상류층이 아닌 저항할 힘도 없는 하층민이다. 정부는 실수를 인정하기보다 덮으려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도 처형하려는 것이다. 이 대목을 보면서 오늘날 한국의 현실이 떠올랐다. 올해초 용산학살을 자행한 한국정부도 검찰을 동원해 경찰의 잘못은 덮고 철거민을 테러리스트로 몰아 감옥에 보내려 하고 있다. 한국도 공안정부가 강화되고 시위의 자유를 박탈하고 사이버모욕죄 등 인터넷감시를 본격화하면 “브라질”에 나온 사회처럼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정부의 감시보다 더 무서운 것은 소비사회다.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소비사회야 말로 “브라질”를 지배하는 힘이다. 영화 속 시간은 크리스마스다.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이 보편화된 크리스마스는 서구사회에서 자본주의 축제일이라고 할만 하다. 미국에서도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팔리는 상품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이 기간 팔아서 먹고산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이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 할 것 없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느라 거리는 복잡하다. 도심 여기저기서 테러리스트의 폭탄이 터지지만 금새 잊혀지고 사람들은 상품을 사러다닌다.

샘이 근무하는 사무실의 동료들은 상사의 감시를 피해 영화를 소비한다. 몰래 영화를 보면서 무료한 일상의 탈출을 꿈꾼다. 소비는 감시를 벗어나는 출구이지만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 부자들은 일도 하지 않고 소비만 할 수 있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일에 짓눌려 소비할 기회도 많지 않다. 소비를 권하는 광고판에 있는 행복이라는 문구와 이상적 이미지에 현혹되어 그걸 즐길 상상만 허락된다.

샘이 여자친구를 구하기 위해 정부문서를 열람하다가 잡혀서 감옥에 있는 동안 정보기관장이 산타클로스 복장으로 그를 찾아온다. 정부기관 단체장이 자본주의 신이라 할 수 있는 산타클로스로 설정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고위관료나 대기업임원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거대 기업이 뒤에서 배후조정하고 있더라도 일반인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모든 정보는 정부가 관리하고 커뮤니케이션이 차단되어 있는 사회이니까 가능하다. 용산학살에 대한 비판도 주로 진압한 경찰에 초점이 맞춰지지 그 뒤에 숨어서 용역깡패와 경찰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한 건설기업들에게 비난이 쏟아지지 않는다. 광고로 신문사를 통제하고 권력기관에 결탁된 기업은 보이지 않는 진정한 권력자이다.

이 영화의 주제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장면은 샘이 승진해서 들어간 사무실에서 일어난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은 공간이고 책상도 옆사무실 직원과 공유한다. 반대쪽에서 책상을 끌어당기자 샘은 그 책상을 다시 찾아오려고 경쟁하다. 비록 벽으로 가려졌을 뿐이지 보이지 않는 상대와 경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경쟁은 이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파괴한다. 샘은 이런 경쟁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비사회적 인물이라서 성공할 가능성도 별로 없다. 게다가 성공하려는 욕망도 크지 않지만 경쟁할 수 밖에 없다. 적어도 경쟁하는 동안 그걸 만든 사회에 불평하지 않을 수 있고 사회에 봉사할 수 있다. 감시와 소비가 교묘하게 결합하여 움직이는 사회는 개인의 경쟁으로 더욱 단단해진다. 사회의 상층부로 오르려는 경쟁이 계속되는 한 이 사회는 안전하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브라질”이란 흥겨운 노래는 암울한 미래와 대비된다. 전혀 즐겁지 않은 상황에서도 흥겹게 노래를 흥얼거리는 인간은 마비된 이성의 상태다. 소비는 이성을 마비시키는 마취제와 같다. 멋진 상품을 소비하는 동안 사회는 잠시 아름답게 보인다. 그걸 만드는 회사는 마치 자유의 기업처럼 여겨진다.

영화의 결말이 되어도 도심테러를 일으키는 단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사람들은 공포로 몰아넣기 위해 정부가 주도한 테러일지도 모른다. 극도의 공포 속에서 정부를 믿고 따를 수 있게 하려고 벌인 음모일 수도 있다. 경찰이나 군대는 점점 늘어나고 테러를 막기 위해 국민의 권리를 제약하는 법안을 남발한 미국의 부시행정부도 이와 비슷하다.

공상과학 영화에서 한국의 현재와 미래를 보았다. 개인에 대한 정부감시 정책이 늘어나고 있고, 방송도 대기업에 넘겨주려하고, 인터넷도 통제할 날이 머지 않았다. 이 모든 게 성공한다면 “브라질”이 한국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 통치하고 감시하는 권력의 실체도 모른 채 개인의 인권은 손쉽게 버려질 수 있다. 이런, 우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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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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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2 2009년 2월 10일, 12:05 am

    정말 지금의 정부와 상당히 비슷하네요.

  • 리카르도 2009년 2월 10일, 5:20 am

    1984 읽은분들 끼리 모임이라도 만들었으면 좋겠네요.
    깊히 공감하고 갑니다.

  • 류동협 2009년 2월 10일, 10:27 pm

    A2 — 안타깝지만 그런 인상을 지울 수가 없네요.

    리카르도 — “1984”는 정말 명작이죠. 이걸로 독서토론 모임을 해보는 것도 재밌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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