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 속에 감춰진 인간의 위선

근대화 속의 가난

이 소설은 다섯 살 짱아의 눈에 비친 1960년대 식모살이하는 봉순이 언니의 삶을 세세히 묘사한다. 봉순이 언니와 짱아의 관계를 중심으로 가족사도 간접적으로 보여주며 더 나아가 1960년대 한국 근대의 가족사의 편린도 그려내고 있다. ‘봉순이 언니’를 통해 근대화에 낙오된 불행한 인간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봉순이 언니는 짱아네 집에서 살면서 가사일을 하는 식모였다. 짱아만이 봉순이 언니를 식모가 아닌 가족처럼 생각하고 따랐다. 짱아의 어머니는 불쌍한 봉순이 언니를 데려다 잘 해주지만 가족으로 대하진 않았고 짱아의 아버지, 언니, 오빠들도 그랬다. ‘봉순이 언니’는 짱아가 이런 현실을 깨달아 가며 다른 가족처럼 봉순이를 경멸하는 어른이 되는 성장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식모들이 나온다. 봉순이 뿐만 아니라, 셋집 식모를 무시하던 주인집 식모였던 정자, 골초에 불량스러운 옆집 식모 미자, 값비싼 패물은 다 버려두고 옷가지만 챙겨서 도망간 미경이도 있다. 식모는 여공과 더불어 60~70년대 수많은 여성들이 먹고 살려고 가졌던 대표적 직업이었다. 이들은 가난하고 못 배웠다는 이유로 이런 직업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근대화 담론 속에 가난은 제일 먼저 극복되어야 할 수치였다. 수출 몇억불탑을 달성하고 선진국으로 진입을 목표로 삼던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이 서있을 자리는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잘 사는 나라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모두의 희망이었다. 반대로 봉순이처럼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가난은 절망이었다.

짱아 어머니와 이모는 봉순이의 불우한 처지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아무튼 세상 사는 게 말이야.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 심정 아는 거지. 있는 사람들이 무섭다니까.” 있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을 괄시하는 세상을 경계하던 이들도 결국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 근대화된 한국사회에서 없는 사람은 없어져야 할 존재가 된 것이다. 근대화의 가치 어디에도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는 눈을 씯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90년대 시선을 들여다본 60년대

짱아는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어린아이가 아니다. 다섯살 짱아는 한글을 일찍 깨쳐서 선데이 서울을 즐겨읽었고 담배도 서슴없이 피우는 한마디로 애늙은이다. 즉, 짱아는 삼십대의 공지영의 시점이 투영된 아이다. 공지영은 순진한 아이와 살벌한 현실을 대비시키기보다 비판적 자아로 짱아를 설정하였다. 90년대의 시점으로 60년대의 과거를 바라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짱아는 매사를 삐딱하게 본다. 90년대의 눈으로 본 60년대는 절망 그 자체였다.

소설에서 과거는 보통 낭만적으로 그려진다. 하다못해 애틋한 정서라도 담겨있다. 하지만 ‘봉순이 언니’ 속의 과거는 메마르다. 학생들의 데모가 끊이지 않았고,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동네 골목에서 주인집 아이라 놀림을 당하던 무서운 나날들이었다.

지금은 서구화된 생활습관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60년대에는 새로운 흐름이었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짱아의 아빠는 가족의 식단을 서구식으로 정한다. 어머니는 굽이 높은 슬리퍼를 신고 다녔고, 머리도 싹뚝 잘라버렸다. 하지만 봉순이는 이런 흐름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다른 식구들이 토스트에 마가린을 발라먹을 때 부엌 구석에서 누룽밥을 고집했다.

60년대는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변되는 청년문화가 생겨난 시대이다. 근대화와 더불어 들어온 서구적 문물에 혼란스러워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90년대 짱아의 눈으로 본 60년대는 밖에 나가기조차 싫었다. 짱아와 봉순이의 연대는 시대적 변화에 대한 반발심리를 읽을 수 있다. 봉순이와 짱아의 관계는 아주 끈끈했다.

봉순이 언니는 내가 울기 시작하자 미자 언니네 방안으로 얼른 달려왔고, 잠이 깨서 우는 나를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꼬옥 안아주었다……. 아직도 봉순이 언니는 내가 서러울 때, 내가 따돌림당할 때, 내가 혼자 외로울 때 나를 안아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엄마였고 언니였고 그러면서 친구인 그녀는, 내 첫사람이었다. (62쪽)

짱아에게 봉순이는 어머니같은 존재였고, 혼란스런 세상에 도피처였다. 그만큼 둘의 관계는 각별했다. 짱아와 봉순이는 주인집 딸과 식모의 사이를 넘어선 관계였다.

계급간의 사랑은 위선

이 소설의 핵심은 인간의 위선에 대한 고발이다. 짱아의 어머니는 나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위선적인 인물을 대표한다. 봉순이를 못된 집사에게서 구해내는 선한 심성을 가졌지만 나중에는 도둑으로 몰기도 하고 내몰듯 시집보내고 자신의 삶에서 지워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그게 다 봉순이를 위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나도 할 만큼 했어. 자식이라도 나는 더 이상은 못 해준다. 대체 지난번 집 나갔다 왔을 때 걔 수술시켰지. 시집보냈지. 남편 약값 물어줬지……도와주지 못할 바에야 모른 척하는 수밖에 더 있니? 그래, 그리고 다음에 혹시 봉순이가 우리 이사간 집 전화번호 묻거든 니가 적당히 알아서 둘러대라. (185~186쪽)

짱아 어머니는 짱아에게 봉순이는 우리 식구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봉순이가 진짜 가족이었다면 모른 척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주려고 했을 것이다. 짱아 어머니는 선한 의도를 가졌지만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외면한다. 책임지지 못하는 선한 의도는 위선에 불과하다.

공지영은 위선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게도 돌리고 있다. 짱아는 커서 운동권에 투신하여 노동자의 삶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나중에 공장주에게 발각된다. 이걸 오히려 위안으로 삼고 자신도 할만큼 했다고 믿는다. 결국 운동권 출신 386세대에 대한 위선까지 문제삼고 있다. ‘봉순이 언니’는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 운동에 투신했지만 지금은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땅투기를 서슴지 않고, 자식의 사교육을 위해 공교육을 뒤흔드는 데 열심인 386세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중산층 계급인 짱아는 노동자 계급인 봉순이를 측은하게 여긴다. 짱아는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실천했다. 노동자 운동에 뛰어들어 그들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이것도 잠깐이다. 다시 중산층으로 돌아와 자신의 계층에 걸맞는 삶을 살아간다. 짱아의 어머니가 했던 위선보다 짱아의 위선이 더 교묘하고 잔인해 보인다.

짱아와 봉순이의 삶은 소설 속에서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후로 봉순이 언니의 방문이 그렇게 얼마간 성가시고 부자유스러울 만큼 나는 잘 자랐다. 아버지의 회사는 더욱 더 안정되어 갔고, 언니 오빠도 어머니의 원대로 좋은 배지를 교복에 달며 잘 자라주었으니까. 우리는 더 넓은 아파트로 5년마다 한 번씩 이사를 갔고……봉순이 언니는 그후에도 끊임없이 남자들과 도망을 치고 다시 혼자가 되어서 돌아왔고 그때마다 아이를 하나씩 더 달고 왔을 뿐, 점점 더 가난뱅이가 되어갔다. (188쪽, 191쪽)

1960년대 근대화 과정 속에서 혜택을 누린 짱아 가족과 봉순이의 운명은 완전히 달랐다. 풍족한 교육을 받고 돈도 많았던 짱아는 잘 살게 되었지만, 교육도 못받고 빚만 진 봉순이는 더욱 가난해졌다. 그 둘의 계급 차이는 깊어져만 갔다. 동화 속에 등장하는 모두가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식의 행복한 결말은 현실에 없었다.

타계급에 대한 연민을 품었던 짱아는 그 마음을 거두어 들인다. 우연히 지하철에서 짱아는 봉순이 언니가 그 옛날의 반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 보는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냉정하게 외면하고 달아난다. 짱아는 봉순이 언니가 품고 있는 ‘희망’을 징그럽다고 표현한다. 성인 짱아은 눈에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예전처럼 자신을 반겨줄 것이라 믿는 봉순이 언니가 한심하다.

쥐약을 먹고 죽어가던 강아지 메리가 문을 열어달라고 낑낑대던 모습과 추래한 차림에 냄새까지 나던 봉순이 언니의 모습이 겹쳐진다. 더이상 겉으로라도 친한척 하는 위선조차 베풀지 않는 짱아가 된 것이다.

‘봉순이 언니’는 어린 시절 엄마의 위선과 훗날 자신의 위선을 비교하고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세밀한 묘사에 비해 후반부 이야기는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그래서 둘 사이의 비교가 효과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점이 아쉽다. 그리고 근대화, 서구화에 적응하지 못한 봉순이 언니의 이후의 삶을 사건을 통해 묘사하기보다 추상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초반부의 현미경 같은 서술이 결말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봉순과 짱아의 관계를 통해서 인간의 위선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만은 높이 살만하다.

공지영 (1998) 봉순이 언니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서 기사가 되었습니다.

In Category: 문화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Show 5 Comments
  • foog 2007년 12월 1일, 7:59 am

    잔혹소설이로군요. 저는 이런 소설을 쓰는 것은 참 재밌을 것 같은데 읽기는 싫을 것 같아요. SM중에서 S쪽인듯.. 🙂

  • syd K. 2007년 12월 1일, 2:53 pm

    언제나 공지영 소설은 보고나면 뒤가 찝찝한데,
    이것도 보지 말아야겠네요… (보다가 집어던질듯 =.= )

  • 류동협 2007년 12월 2일, 12:48 pm

    foog — 제가 평을 너무 그렇게 썼나요? 사실 잔잔한 면이 더 많은 소설이죠. 60~70년대 정서에 대한 서술도 있고, 살아가는 얘기도 많죠. 생각할 거리를 좀 던져주죠.

    syd K. — 난 공지영 소설이 처음이라 특별히 호불호가 없었지. 넌 꽤 읽었나보군. 영화로도 봤지만, ‘우행시’가 한번 보고 싶었는데, 그건 도서관에 없더군. 혹시 모르지 다음에 가면 있을지도.

    누군가 그러더군 공지영 소설에는 운동권 정서가 있다구. 이것도 뒷부분에 그런 얘기가 좀 나오던데, 그 부분은 좀 공감이 안가더라. 얘기가 영 따로 노는 것 같아서. 의도는 뭔지 알겠는데, 소설 속에 잘 형상화가 안된 느낌이 들더라.

  • syd K. 2007년 12월 5일, 9:00 am

    많이 본 건 아닌데, 운동권 정서랄까, 그런 쪽에서 좀 난체하는게 별로라서…. (심지어 무소의뿔 보고도 비분강개한 인간 =.= )

  • 류동협 2007년 12월 5일, 7:34 pm

    syd K. — 비분강개라 ^^ 무엇때문에 화가 났을까 한번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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