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과 변화의 신화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1982)

Blade Runner

우주 식민지 건설이 한창 진행되는 시대가 바로 블레이드 러너의 배경이다. 지구는 한 눈으로 보아도 암울하고 비관적인 세계로 묘사되어 있다. 지구인들은 희망이 사라진 지구를 떠나 새롭게 건설된 우주로 떠나가고 있다. 어두운 하늘에는 늘 산성비가 내리고, 낡고 허름한 건물 외벽을 가득 메운 거대한 광고가 있고, 온갖 인종이 모여있는 거리는 북적거린다. 2019년 LA에는 전원적인 삶은 사라지고 도시의 더럽고 비인간적인 모습만 남아 있다. 컴컴한 하늘을 향해 뚫려있는 굴뚝은 폭발하며 기계음을 낸다. 한 눈에 보더라도 디스토피아적 세계로 변해버린 우울한 풍경이다.

화염에 휩싸인 하늘을 나는 비행선과 불빛으로 가득 찬 건물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있다. 눈동자는 세계를 인식하는 창이면서 동시에 내면을 표출하기 위한 결정체이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합성인간과 인간을 구별하는 방법은 바로 눈동자의 움직임으로 알 수 있다. 눈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빛을 투사하는 것의 결합이다. 어떤 사건을 당하면 감정의 변화가 그대로 눈에 나타난다. 감정의 미묘한 변화조차 나타난다는 눈을 통해서 합성인간과 인간의 차이가 생긴다. 눈은 솔직한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이다. 타이렐이 커다란 반사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은 그의 위선과 허위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들 속에 섞여있는 합성인간을 찾아내서 제거하는 역할을 하는 특수 경찰이다. BLADE(칼날)과 RUNNER(달리는 사람)의 합성어는 이들의 임무를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칼날을 긋는 것처럼 인간과 합성인간을 나누기 위해서 끊임없이 달리는 사람이란 뜻이다. 과연 인간과 합성인간의 차이는 무엇이며, 이것을 기계처럼 구분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합성인간, 즉 리플리칸트는 인간적인 감정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레이첼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데커드에게 화를 내고, 슬픔에 잠긴다. 그렇다면 과연 블레이드 러너가 하는 보이트 캄프 테스트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브라이언 반장이 하고 있는 말처럼 이들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감정을 가지게 된다. 리플리칸트는 인간의 유전자 합성으로 만들어진 완벽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 인간이다. 인간과 리플리칸트의 경계는 예초부터 붕괴되기 위해서 설정된 한시적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로이가 별들의 전쟁을 겪으며 생긴 감정은 그를 인간과 구분되지 않도록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인간에 도전해서 반란을 일으킨다. 로이의 반란은 인간과 리플리칸트의 경계를 해체하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경계를 설정하는 것은 질서를 만드는 것이다. 태초의 창조 신화들을 살펴보면, 태초의 혼동 상태를 타파하고 질서를 만들어내는 신의 탄생이 있다. 그리스트교의 창조론에는 하느님의 7일간의 작업으로 지구에 질서를 부여하였다. 태초의 혼돈 상황이 제시되어 있고, 혼돈을 벗어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해야한다. 많은 신화에서 뱀이 혼돈스러운 상태를 상징하는데 조물주가 나타나 그 뱀을 쳐서 죽이고 온 세상을 피로 물 드려 하늘, 땅, 바다를 만든다.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위해서 뱀의 희생은 필연적이다. 창조는 완전한 무에서 유로 이뤄진다기 보다 불완전한 유에서 완전한 유로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창조는 불완전한 상황을 인지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질서로 무장하는 과정이다. 신화에서 태초의 신비는 밝혀지지 않고, 문제 상황의 해결이 주요 관건이 된다. 창조 신화가 제시하는 창조는 종교적인 제의적 상황을 재현한다. 현실 속에 생성되는 다양한 문제와 갈등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창조를 언급한다. 무질서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운동 모두를 창조의 한 갈래로 볼 수 있다. 창조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알려주는 교두보이다.

모든 세계는 시작과 종말을 지니고 있다. 한 때 번성했던 문화도 언젠가는 쇠퇴기를 거치기 마련이다. 쇠퇴기에 다다른 문화는 무질서한 상황이 전개되어 끝내는 파멸에 이른다. 파멸을 부르는 것은 또한 새로운 세계의 질서이다. 이를 통해 질서는 새롭게 정의되고, 세계는 끊임없이 부활하는 영원의 수레를 굴리는 것이다. 질서와 무질서는 서로 끌어당기는 인력을 가지며, 세계를 생성하는 양과 음이 된다. 무질서한 상황이 극단에 이르면, 질서가 출현해서 무질서를 보내고, 질서가 극에 치달으면 무질서가 난무한다. 블레이드 러너가 위치한 지점은 질서가 극에 달해 무질서가 시작되는 곳이다. 인간의 통제가 엄격해지고, 계급적인 서열이 정해져 있다. 타이렐의 회사의 모양은 엄격한 위계체계를 알려준다. 거대한 피라밋 모양은 고대 왕족이 누린 권위를 뜻한다. 타이렐은 그 회사를 지배하는 파라오처럼 사람들 위에서 군림한다. 소수의 지배 계층은 사회의 상층부에서 하층의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타이렐이 살고 있는 곳도 고층이며, 일반인을 감시하는 경찰도 하늘 위에 떠있다. 수직적으로 펼쳐진 질서의 고리는 고대의 엄격한 계급 사회와 닮았다. 질서의 세계에서 철저한 공간적 분리를 통해서 통치자는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한다. 타이렐은 넓고 편안한 공간을 혼자서 차지하고 심지어 인간의 하인을 창조하고 있다. 타이렐을 비롯한 인간은 리플리칸트를 노예로 만들고 속박하는 엄격한 질서를 가지고 있다.

이런 질서는 리플리칸트의 혁명에 의해서 붕괴되고 만다. 리플리칸트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질서를 거부하고 인간과 리플리칸트와의 경계를 해체하는 혁명가이다. 질서의 붕괴를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그 질서를 만들고 누리는 사람이다. 인간과 리플리칸트의 지배와 종속 관계는 그런 질서를 유지시키는 강력한 요인이다. 이런 위계 체계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 계속된 형태의 지배와 착취를 수행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인간과 리플리칸트의 관계를 유추하면, 신과 인간의 관계를 도출할 수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들은 불멸의 존재라는 점을 빼면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다. 무한과 유한의 차이는 시간적인 길이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신과 인간의 차이만큼 크지는 않지만 넉서스 6의 수명이 4년인 것과 인간의 수명이 80년이라는 것은 상당한 차이점이 된다. 이런 차이의 벽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신화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프쉬케가 신이 되기 위해서 거쳐야 했던 수많은 장애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 벽이 확고하고 단단함을 알 수 있다. 인간이면서 신이 되고자 했던 프쉬케처럼, 로이는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담대하게 타이렐을 찾아가지만 거부당한다. 로이의 분노는 리플리칸트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유한자의 체념이다. 로이가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리플리칸트는 인간이 될 수 없다. 비관적인 운명을 타고난 로이는 신화 속의 인간이다.

역사의 발전에 따라서 인간은 신의 권한을 물려받기 시작했다. 신들의 영역으로 구분되는 생명 창조도 인간의 손에 맡겨졌다. 인간은 유전 공학을 통해서 동물을 인공으로 조작하고 심지어 인간을 복제하는 기술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완벽한 신이 되지는 못했지만, 리플리카트를 만들어 자신의 위치를 격상시켰다. 거대한 위계 체계의 상층부에서 하층부를 거듭 생산해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게 되었다. 타이렐은 넉서스 6을 더욱더 인간다운 합성인간으로 만들어 신의 역할을 흉내내고 있다. 이런 신성 모독은 신화에서 항상 불경스러운 것이며, 처벌을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벨론의 탑을 만들어 하늘에 닿고자 한 인간의 욕망은 언어의 분화를 통해 단합을 깨뜨렸고, 신의 영역을 침범한 타이렐은 자신의 피조물인 로이에게 죽는다. 하지만 신성 모독을 한 타이렐을 죽임으로 신화가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블레이드 러너가 말하고 싶은 바는 신성 모독이 아니라 신성 모독의 초월이다. 신성 불가침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노력은 거대한 운명의 사슬을 끊는 것이 아니다. 신성한 영역의 침범은 오히려 운명의 변함없는 수레바퀴 안으로 들어가 갇히는 것이라고 풍자한다. 타이렐의 두 눈이 터지는 것은 그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낸다. 결국 타이렐과 같은 인간형은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었다.

블레이드 러너의 진정한 주인공은 로이를 비롯한 리플리칸트이다. 로이는 자신을 만든 창조자를 원망한다. 자신의 두 눈으로 보았던 끔찍한 상황들을 창조자에게도 보여주고 싶어한다. 즉 로이는 자신에게 강요된 프로그램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는 거대한 운명의 사슬을 벗어나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싶었다. 로이가 죽는 순간에 날아가는 비둘기는 자유를 상징한다. 로마시대에는 노예들이 죽으면 비둘기가 된다고 믿었다고 한다. 푸른 하늘을 날고 있는 하얀 비둘기는 정화된 로이의 영혼이 자유롭게 비상하는 모습이다. 로이가 죽는 순간 깨달은 삶의 가치는 고뇌와 슬픔을 초월한 자유이다. 로이가 만든 신화는 기존의 신화와는 달리 위계를 내세우는 질서를 해체한다. 로이가 상징하는 바는 질서화하려는 모든 원리를 해체하는 힘이다. 로이는 고정된 이미지가 작용하는 것을 막는 변화의 화신이다. 로이는 자신의 몸이 제한된 수명 때문에 마비되는 것을 지연시키기 위해서 손에 못을 박는다. 비록 제한적이지만 변화의 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로이가 악마 혹은 루시퍼로 비춰지는 것은 변화하는 속성 때문이다. 천상적인 세계는 모든 것이 완벽하기 때문에 변화가 필요없고 심지어 해로운 것이 된다. 질서가 미덕으로 여겨지는 천상적 세계는 변화를 가능한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변화와 안정은 서로를 밀고 당기면서 대립하는 악과 선의 비유이다.

로이가 남성으로 질서의 해체로 나아갔다면, 레이첼은 여성으로 해체를 넘어선 사랑으로 나아갔다. 레이첼은 타이렐 회사에서 만들어질 당시에 다른 사람의 기억을 이식시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레이첼은 다른 리플리칸트보다 인간에 가까웠다. 자신이 리플리칸트인지도 깨닫지 못하게 정교하게 창조되었다. 레이첼은 자아정체성을 찾는 여정의 한가운데에서 데커드와 사랑에 빠진다. 사랑은 끝없는 지배와 종속의 사슬을 벗어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다. 사랑은 그물처럼 얽힌 관계를 벗어나며, 동시에 자신에 매몰된 자아를 벗어나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레이첼은 자신이 속한 위치를 잃어버리고 속박으로부터 탈출한다. 데커드가 레이첼과 처음 만나서 얘기를 나눌 때는 인터뷰라는 딱딱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레이첼은 차가운 빛깔의 단정한 옷을 입고 헤어스타일도 규격화된 형태를 띄고 있었다. 레이첼이 데커드를 좋아한 후의 그녀는 인간적 흐트러짐을 몸에 간직했고, 헤어스타일도 꼬불꼬불한 곱습머리로 변했다. 그녀의 변화를 이끈 것은 사랑의 감정이다. 사랑은 이기애라기 보다는 이타애쪽이 강하다. 자기에만 매몰되어 있다면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타인을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변화도 전제되어야 한다. 사랑은 자신과 타인에 걸쳐있는 다리와 같아서 타인의 변화와 자신의 변화는 직접적이며, 때로는 치명적이다.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 자신도 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레이첼과 로이의 변화하는 속성을 묶어주는 존재가 바로 데커드이다. 느와르 영화의 주인공처럼 데커드는 현실을 완벽하게 해결할 능력이 없으면서 오히려 운명에 휘둘리는 나약한 존재이다. 데커드는 로이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로이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궁지에 몰린다. 또한 로이가 데커드를 죽음으로부터 구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한다. 그 의 위치를 가늠하게 만드는 요소는 그가 꾸는 꿈이다. 그는 꿈 속에서 숲을 달리는 유니콘을 본다. 유니콘은 대체로 처녀성, 여성, 순결을 뜻하지만, 남성적인 요소도 함께 포함하고 있어, 이중적인 의미를 띈다. 유니콘의 머리에 나있는 뿔은 양가적인 의미가 결합함을 상징한다. 즉, 이항대립적인 남성과 여성 혹은 육체와 정신이 뿔을 통해서 합쳐진다. 데커드는 레이첼과 로이 사이를 오가면서 둘의 힘을 결합시킨다. 로이의 남성적인 해체적 파괴 본능과 레이첼의 여성적인 창조적 융화 본능이 합쳐진다. 데커드가 추구하는 것도 질서 확립이 아니다. 로이의 레이첼의 변화무쌍한 혼돈 상태를 그대로 따른다. 데커드가 은퇴한 블레이드러너라는 점도 자신의 혼란한 의식 상태를 알게 해준다. 데커드는 전직 블레이드러너이지만 현재는 그 일에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또 그는 그가 제거해야할 리플리칸트 중의 하나인 레이첼을 사랑하게 된다. 데커드가 처한 모순적인 상황은 안정된 질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안전 장치가 되는 것이다. 또 데커드는 질서 정연한 위계 사회의 주변에 머무르는 비주류 인물이다. 데커드가 지니는 비주류성은 자신의 삶을 변화 속으로 몰아 넣는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의 세계관은 전혀 변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미래가 해체와 융화를 통해서 부활을 기원하는 것이다. 로이는 자신의 눈, 유전자 등을 만든 창조자를 죽이는 것으로 고리를 끊으려했고, 레이첼은 인간적 세계에 융화하는 것으로 고리를 끊으려했다. 피조물들의 끈질긴 집착으로 창조주는 이에 굴복하고 자신의 질서를 내주게 된다. 역사의 진보를 믿지 않는 비관적인 세대에서 바라본 미래가 블레이드 러너이다. 동양의 공의 세계로 들어가 여러 가지 굴레와 속박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진공 상태가 된다. 비밀 경찰 블레이드 러너가 달려온 길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인간과 리플리칸트의 구분이 사라지고, 평등해진다. 혼돈의 우주를 재창조해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변화의 신화가 추구하는 것이다. 균질된 시간과 균질된 공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의 대부분의 시간은 밤이 주도적이다. 이것은 낮의 입체적인 공간과 시간이 밤의 평면적인 공간과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을 암시한다. 규질적인 공간과 시간은 방향감의 상실을 유도한다. 비행선은 공중을 부양하지만 동서남북도 알 수 없고, 깊이도 알 수 없다. 시간의 흐름도 짐작하기는 어렵다.

로이가 마지막에 남긴 말은 그때까지 벌어진 모든 상황을 설명한다. “모든 그 순간들은 시간 속에서 사라지겠지. 빗 속의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 비와 시간은 거대한 혼돈을 뜻하고, 순간과 눈물은 자아를 뜻한다. 자아의 부지런한 활동도 결국 혼돈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혼돈 속으로 사라지는 자아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떠난 여행이 블레이드 러너의 여행 경위와 비슷하다.

In Category: 문화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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