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절박함이 느껴진 81회 오스카 시상식

오스카 시상식을 보기도 전에 나를 맞이한 건 팝콘 냄새였다. 환기구를 통해서 어느 집에서 튀긴 팝콘향이 들어왔다. 영화관하면 떠오르는 팝콘은 아마도 오스카 시상식을 보려고 모인 사람들의 간식거리일 것이다. 반사적으로 텔레비전을 켜고 오스카를 생중계해주는 ABC로 채널을 맞췄다.

아직 시상식이 시작 전이었고 바바라 월터스가 수상후보 몇 명과 사회자를 맡은 휴 잭맨을 인터뷰하고 있었다. 바바라 월터스는 날카롭고 솔직한 질문으로 미키 루크의 힘든 시기를 다뤘다. 미키 루크는 왕년의 황금기와 심리치료 받은 경험까지 다 털어 놓았다. 바바라 월터스는 역시나 탁월한 인터뷰 솜씨로 다른 배우들의 근황과 궁금한 질문을 나눴다. 가장 기억이 남는 건 피플지가 선정한 가장 섹시한 배우 휴 잭맨에게 스트리퍼가 추는 랩댄스를 요구한 부분이다. 휴 잭맨은 흔쾌히 일어나 춤으로 바바라 월터스 할머니를 즐겁게 해줬다.

작년에 최악의 시청률을 기록한 오스카 시상식을 피하려고 올해는 대대적으로 시상식을 바꿨다. 전체적으로 쇼는 늘어나고 의례적인 건 줄었다. 사회자도 그동안 고수했던 코미디언이 아닌 춤과 노래를 할 줄 아는 배우 휴 잭맨을 선택했다. 휴 잭맨은 스탠드업 코미디가 아닌 뮤지컬로 최우수 작품상 후보들을 소개했다. 주로 음악상 후보에 오른 노래를 공연하는 방식에서 뮤지컬로 전환했다. 공을 들인 만큼 영화에 대한 소개와 유머가 적절히 녹아있었고 휴 잭맨의 춤과 노래는 대단했다. 이미 토니상 시상식의 사회를 볼 정도의 실력을 갖춘 휴 잭맨은 오스카 시상식도 어렵지 않게 소화했다.

늘어난 뮤지컬 공연 때문인지 오스카가 아닌 토니 시상식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휴 잭맨의 원맨쇼는 즉흥손님으로 앤 헤서웨이를 무대로 불러서 공연을 마무리했다. 휴 잭맨은 예전에 토니 시상식에서도 사라 제시카 파커를 불러내서 그녀를 난처하게 한 전력이 있다. 앤 헤서웨이는 마치 리허설이라도 한 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노래를 받아주고 춤까지 멋지게 소화했다. 이 날 뮤지컬 공연에서 가장 볼만한 장면이었다.

시상 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시상자가 나와서 농담하면서 영화의 장면을 보여주는 걸 생략하고 말로 소개했다. 특히 주요 부문인 남녀주연상과 남녀조연상은 예전의 수상자가 각각 5명씩 나와서 수상후보를 한명씩 맡아서 소개했다. 수상후보에 오른 배우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들을 수 있어서 새로웠지만 묘한 구석이 있었다. 소개를 맡은 예전 수상자에 따라서 소개가 지나치게 짧거나 장황해지는 편차가 있었다. 잘 아는 배우라면 할 말이 많아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짧아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의례적이 아니라 개인적 분위기라서 흥미롭긴 하지만 다섯명의 전직 수상자가 뻘쭘하게 무대에 서있는 풍경이 낯설었다. 아무튼 오스카가 배우를 좀더 신경써주는 느낌을 받았다.

시상식에서 가장 큰 웃음을 준 이는 밴 스틸러였다. 가짜 수염을 잔뜩 붙이고 나와서 아무 말도 없이 나탈리 포트만 옆에서 껌을 씹으며 멀뚱멀뚱 서있었다. 시상에는 전혀 관심없는 사람처럼 무대를 배회하기도 하고 스크린을 멍하니 쳐다봤다. 나탈리 포트만이 밴 스틸러에게 껌을 뱉으라니까 슬며시 테이블에 붙여놓았다가 다시 씹으며 들어갔다. 얼마전 데이빗 레터맨쇼에서 호아킨 피닉스의 행동을 모사한 것인데 은근히 웃겼다.

헐리웃 배우들 중에 진보적 인사가 좀 있는 편이라 시청률이 가장 높은 시상식 중 하나인 오스카에서 정치적 발언이 자주 있어왔다. 올해는 누가 한마디를 해줄까 기대했는데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숀 펜이 그 역할을 맡았다. 지금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큰 이슈는 동성애 결혼이다. 오마바를 대통령으로 뽑는 날에 동성애 결혼에 대한 국민투표가 있었는데 아쉽게도 거부당했다. 숀 펜이 연기한 영화 ‘밀크’는 동성애자의 인권에 관한 것이다. 이 날도 숀 펜이 시상식장으로 오는데 동성애반대주의자들이 몰려와서 시위를 했다. 숀 펜은 동성애 결혼을 금지하는 법안에 찬성을 던진 이들에게 아이들 눈에 비칠 당신을 한번 생각해 보고 부끄러운 줄 알라고 말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1억 달러에 가까운 상업적 흥행과 더불어 작품상과 감독상 등 오스카 8개를 가져갔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아서 뭐라 말하긴 어렵지만 이 영화는 인도 슬럼가에서 고난을 이기고 성공한 소년의 삶을 다룬다. 희망을 담은 영화라서 지금의 경제위기와 절묘하게 어울린다. 부부가 수상후보로 올랐던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는 각각 케이트 윈슬린과 숀 펜에게 오스카를 내줘야 했다. 그리고, 고인이 된 히스 레저를 대신해서 그의 가족이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고인이 수상하기로는 두번째다.

1954년 84퍼센트의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였던 오스카 시상식은 예전의 영광을 찾기 어렵다. 영화가 최대의 오락거리였던 시대가 사라지고 영화는 휴대전화, 비디오 게임, 아이팟과 경쟁해야 한다. 시청률 하락을 막으려고 오스카 시상식은 쇼를 대폭 보강했다. 컴퓨터 그래픽을 적극 활용하면서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려고 무척 노력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변하지 않으면 잊혀지고 말 것이라는 절박함이 이번 81회 오스카에서 드러났다. 새로운 시도가 얼마나 대중에게 호소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확실히 나아졌다. 지루하고 중복된 부분을 줄었고 재미있는 공연은 늘어났다. 누가 상을 받는지 인터넷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시대이니 시상식도 흥미없으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오스카 시상식이 끝났으니 한동안 오스카 마케팅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다. 오스카 효과로 후보작이나 수상작이 다시 개봉관을 늘려갈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무렵에는 새로운 영화를 개봉하는 일이 드물다. 오스카가 뽑은 영화 중에 몇 편을 뽑아서 직접 보고 판단해봐야겠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아직 작년 수상작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봐야할 영화는 늘어가는데 시간이 없다.

이 글을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후에 한 포탈의 댓글로 제보를 받았다. 앤 헤서웨이가 함께 한 공연이 리허설한 것이란다. 리허설이라도 저렇게 실감나게 연기한 거라면 유쾌하게 속아줄 수 밖에 없다.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In Category: 문화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Show 5 Comments
  • Mr.Met 2009년 2월 23일, 6:51 am

    더 레슬러가 상을 못타 아쉽네요.
    개봉을 계속 기다리고 있는 작품이예요 *_*

  • syd K. 2009년 2월 23일, 10:44 am

    슬럼독 안보셨으면 꼭 보세요^^ 고난을 이겨낸 소년 이런 거라기보다는 적당한 신파가 섞인 볼리우드틱 판타지라죠. 영화가 상당히 세계화를 조롱하는 면이 있어서 오스카는 무리일 줄 알았는데 상을 싹쓸이해가서 깜딱 놀랬다는. 골든글로브때도 그랬지만, 헐리우드의 최신 화두는 세계화인가 봅니다 –;

  • 류동협 2009년 2월 23일, 1:06 pm

    Mr.Met — 저도 응원을 했는데 안타깝네요. 상이 전부가 아니니 앞으로 좋은 작품을 보여주길 기대합니다.
    syd K. — 네 말대로 요즘 대세는 세계화인가 보다. 미국이 문화적 패권을 쥐고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잘 지켜봐야겠다.

  • 프랭키 2009년 2월 24일, 12:12 am

    정말 아카데미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은 모양이에요.
    국내에서는 매년 해주던 생중계도 사라져버렸어요.
    그래서 휴잭맨의 춤과 노래가 보고 싶었는데 아직 못 봤습니다. – –
    아카데미는 그동안 변화의 물결을 멀뚱히 쳐다보는 경향이 없지 않았는데,
    역시 시청률이 그들을 절박하게 만들었나보군요.
    언제든.. 정치나 이념보다는 자본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 류동협 2009년 2월 24일, 9:27 pm

    프랭키 — 작년 시청률은 작가파업의 영향이 컸던 거 같아요. 다행히 올해는 시청률이 올랐네요. 아무래도 휴 잭맨 때문에 여성 시청자가 늘어난 거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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