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에 질식당한 이야기

300 (2006)

300

DVD로 Rome을 빌려보며 그리스 로마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마침 300가 있길래 망설임없이 빌렸다. 비평가들의 평도 좋았고 관객들도 만족스럽다는 입소문 때문에 안심했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거의 졸기 일보직전이었다.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전투신이 이렇게 졸리다니. 이렇게 비평가와 관객의 평과 다른 경우는 드물었다. 그들의 평을 뒤져보았고 나와 비슷한 견해를 공유한 이들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실종된 서사

영화는 철저하게 전쟁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인물간의 갈등도 없이 선악의 대결구조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왕 Xerxes의 군대가 그리스의 도시국가 스파르타로 쳐들어온다. 이를 지키기 위해서 스파르타의 왕 Leonidas는 300명의 특공대를 이끌고 전투에 임해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다. 이게 이 영화에 존재하는 유일한 서사구조이자 뼈대이다. 나머지는 시종일관 “스파르타” “자유”를 외치는 무개성의 디지털 인간들만 있다. 특히 스파르타를 외치는 이유조차 불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스파르타의 군대는 마치 같은 헬스센타에 갓나온 몸짱들이다. 이와 반대로 페르시아 군대는 흉칙한 괴물들이나 이상한 가면을 뒤집어 쓰고 있다. 이들은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왔던 기괴한 괴물이 역사 시대로 튀어나온 것 같다. 페르시아의 왕은 쇠붙이를 온몸에 뚫어서 피어싱을 한 변태성욕자로 그린다. 이쯤되면 세살 먹은 아이가 보더라도 누가 악당이 쉽게 알아맞힐 수 있다.

각 진영 내부에 갈등도 전혀 없고 인물들은 평면적이기만 하다. 이게 지루한 원인 중에 하나였다. 스파르타 도시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설득력 없이 진행된다. 서사 구조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인물들 간의 갈등이나 감정이 드러나야 하는데 디지털 이미지로 보여주려고만 한다. 스파르타의 왕이 어둠 속에서 늑대와 싸우는 장면 하나로 현재의 상황을 설득시키려 한다.

과잉된 이미지

과도한 디지털 이미지는 눈의 피로를 가중시킨다. 사진으로 치면 포토샵으로 과도하게 콘트라스트를 줘서 비현실적인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이게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의 배경은 게임 속의 한장면 같다. 그리스의 배경을 연상시킬만한 장면이 없다. 지나치게 검고 하얀 이미지들이 전달하고자 한 것은 메시지가 아니었다. 아쉽게도 나는 그 이미지도 멋지게 다가오지 않았다.

머리가 잘려나가고 피가 솟구치는 장면들이 많았지만 어떤 것도 현실적이지 않았다. 너무나 깔끔하게 처리된 특수효과와 디지털 피는 게임 속에 있는 듯한 감정만 들었다. 게이머들을 겨냥한 영화가 분명했다. 영화의 예고편에 다른 영화보다 게임 광고가 더 많았다. 이런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전쟁의 허무 같은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았다. 소수의 전사들의 강인한 몸으로 아랍 세계의 적군을 쳐치하는 임무수행 게임이다.

지나친 슬로우 모션의 사용은 이 영화가 이미지에 치중하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거의 모든 전투장면은 슬로우 모션으로 촬영했다. 심지어 신전의 사제가 점을 치는 장면도 슬로우 모션이다. 디지털로 시간을 늘이다보니 영화적 시간은 다시 비현실적이 된다.

이라크전의 은유

이 영화가 아무리 역사 판타지를 표명한다지만 아랍세계에 대한 악의적 묘사는 상당히 불쾌했다. 영화 속 스파르타의 왕은 현재 테러리스트와 싸우는 부시이고, 페르시아의 왕은 미국에 반대하는 빈 라덴을 비롯한 아랍의 테러리스트이다. 아랍세계는 비문명적이며 사악한 몬스터들의 집단이다.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이렇게 묘사한 저의가 무엇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의 죽음에 감명받는 그리스군의 반격으로 채워진다. 마치 미국이 앞장선 전쟁에 모두 동참하라는 식의 은유를 담고 있는 듯하다. 포스트 모던한 이미지를 내세우고 있지만 결국 절대악의 축에 맞서 분연히 일어나라는 전근대적 메시지를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그리스 역사극의 기대했지만 아랍인에 대한 적대감을 심어주는 게임을 한 것이다. 몇 년전 국경을 넘는 멕시코인을 쏴죽이는 노골적인 미국의 게임이 사회적 문제가 된 적 있다. 이 영화는 지능적으로 역사의 은유를 통해서 서구인의 아랍인에 대한 적대감을 해소하는 건 아닐까?

이 영화의 이미지에 열광하는 관객이 디지털 세대라면, 나는 서사구조로 영화를 보는 아날로그형 인간인가? 이 영화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보려는 나의 노력은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걸까? 그래도 나의 영화관은 변하지 않는다. 인물과 이야기가 사라진 영화는 게임에 더 가깝다.

In Category: 문화

류동협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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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랭키 2007년 10월 3일, 10:37 am

    지능적으로 역사의 은유를 통해 서구인의 아랍인에 대한 적대감을 해소한다.. 뭐, 별로 지능적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 너무 빤하게 보이잖아요. 대놓고 니들 디지털 이미지로 넘쳐나근 세계로 한번 들어와볼래, 꽤 볼만해… 하는 것 같더라구요. 300에 대한 열광은 이미지를 접하는 순간에 느끼는 아들레날린이 분출하는 흥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아요. 영화가 끝나면 들끓던 피도 식어버리지요. 그리고 잊어버리죠. 정말 시시합니다.
    요즘 새삼 서사 없는 이미지 과잉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자주 느끼게 되더라구요.

  • 류동협 2007년 10월 4일, 4:53 pm

    @프랭키,
    너무 가벼운 느낌이 강하죠. 뭔가 많은 이미지를 보여주려고 한 것 같은데, 그래서 더 옅은지도 모르죠. 과잉된 이미지들이 영화 속에서 충분히 소화시켜줄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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