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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05

미국 학부생의 시험

May 11, 2005

박사과정 미국인 동기가 시험감독하는 거좀 도와달라고 해서 다녀온 후, 한국 상황과 달라서 자꾸 비교해보게 된다. 한국에서 대형 강의와 소규모 강의 등 조교 생활을 해봤기에 어떻게 다른지 잘 알 수 있었다. 시험을 보는 분위기나 조건은 미국 쪽이 더 자유로왔다. 비교적 넉넉한 시간을 확보해놔서, 그 시간 안에만 와서 시험을 칠 수 있게 해놨다. 먼저 시험을 본 학생이 나중 학생에서 정보를 주지 못하게 몇 가지 다른 문제지를 만들어놨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미국이란 나라에서 그런 식으로 컨닝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문제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 조교한테 구체적으로 물어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정말 귀찮을 정도로 물어보는 애들이 다수이다. 어떤 학생은 아예 정답을 은근슬쩍 물어보는 애들도 있으니까.

한국은 정해진 시간에 와서, 문제지와 답안지를 돌리고 걷어간다. 그래도 지각하는 애들은 거의 없고, 다를 알아서 잘 따라주는 편이다. 정말 이해가 안되는 게 빼고는 거의 질문하는 애들이 드물다. 대부분 알아서 개인적으로 해결한다. 내가 보기에 한국 학생들이 문제해결 능력에서 한수위이다. 미국애들은 한명씩 다 설명해주고, 칠판에 답안지 쓰는 요령까지 적어놨는데, 제출한 답안지를 보면 좀 한심스럽다. 학번을 안쓴 애들이 있는가 하면, 엉뚱한 데 기입을 해놔서 정정하느라 애좀 먹었다. 한국에서 이런 경우는 별로 못봤다. 다들 잘 알아서 자신들의 점수를 챙겨간다.

어느쪽이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미국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주기 때문에 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기회에 너무 익숙해서인지 개인적 문제해결능력은 좀 떨어진다.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보다 시험보는 자리에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모양새가 별로 좋지 않다. 시험을 보는 이유가 수업이해도와 독자적 해결능력을 물어보는 취지인데,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건 학생의 한학기 동안의 성취도가 높다고 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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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두 영화

May 5, 2005

8월의 크리스마스 (1998) vs. 아들의 방 (2001)

사진 밖의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던 정원의 노력이 부질없이도 정원은 영정사진 속에 갇힌다. 영정사진은 그 사람의 죽음의 마지막 기록인 동시에 그 사람을 기억할 수 있는 역설적 매체. 영정사진 속의 정원의 웃음은 시한부 인생이라는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슬픔을 상징한다. 정원의 운명을 가장 인상적으로 드러낸 장면 하나. 까페 안에서 정원이 창 밖의 다림을 손가락으로 만진다. 운명이라는 유리에 갇힌 정원의 마지막 손짓,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이 전달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드러난다. 투명한 유리창은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날카롭게 다림과 정원을 갈라놓았다. 나는 가끔 사진이 유리창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진은 유리창처럼 투명하게 과거의 기억을 보여준다. 우리는 사진을 보는 게 아니라, 유리창 너머의 “옛날 풍경”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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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방>의 지오반니의 조깅은 무척이나 일상적이다. 지오반니에게 조깅은 환자들의 상담이라는 “직업적인 일상”을 벗어나는 “개인적인 일상”이다. 지오반니는 급기야 강박증환자에게 자신이 조깅할 때 신는 신발을 보여주면서 운동을 권한다. 지오반니에게 조깅을 권태를 극복하는 길이었다. 치료를 돕는 의사의 신분이 그에게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라고 한다. 그러나 지오반니는 아들의 죽음 후에 쉽게 환자에 감정이입되는 자신의 모습에 혼란을 겪는다.

결국 지오반니는 자신이 더 이상 객관적일 수 없는 걸 깨닫고 일을 그만 두기로 결심한다. 정신 상담의와 환자라는 관계 속에서 지오반니는 권태를 느꼈고, 모든 걸 훌훌 터는 기분으로 조깅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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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라이트 (City Lights, 1931)

May 1, 2005

현대인의 초상

charliecitylight채플린의 영화를 보면, 코미디의 분위기 아래로 흐르는 진한 페이소스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웃지 않는 것은 아니다. 웃을 수 있는 만큼의 울음을 동시에 담고 있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채플린의 코미디는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슬픔을 감춘 내면적인 영화이다. 무성 영화의 특성상 대사로 처리해야 할 것을 몸짓으로 대신하려다보니 과장된 면도 있지만, 감추어진 것이 많은 건 사실이다. 우울한 감정은 부분적으로 영화 속에서 해소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권위, 힘에 억눌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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